박가분 / 진보신당 고려대 학생위원회

 

 
 

 ‘부루마블’이라는 보드게임은 오늘날 자본주의의 투기적인 모습을 압축적으로 반영한다. 이 게임은 주사위를 던져 먼저 도달한 땅을 사들이고 건물을 지으면 나중에 도착한 상대편 플레이어에게서 일정한 지대를 징수하는 것이 기본적인 룰이다. 더불어 여러 종류의 이벤트를 통해 많은 부를 수탈할 기회, 혹은 수탈당할 위협에 직면한다. 결국 기회를 잘 포착해 상대에게서 최대한 많은 투기적인 수익을 얻는 것이 관건이다. 이 게임의 흥미로운 점은 보드를 한 바퀴 돌았을 때 모두에게 일종의 ‘기본소득’이 지급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모두에게 평등한 ‘기회’가 주어지는 시스템인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시스템이 (생산영역에서의 자본축적과는 다소 다르지만) 자본의 투기적인 축적을 중단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평등한 기본소득이 주어질수록 부의 원천을 선점한 측으로부터 수탈당할 기회는 늘어난다. 오늘날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는 무엇이 생산적 자본이고 무엇이 투기적 자본인지 사실상 구분하기 어렵고, 그러한 구분 자체가 이미 ‘생산적 자본’에 재귀적으로 반영돼 있다. 그래서 부루마블은 기본소득과 같은 부의 재분배가 왜 자본축적을 중단시키기 어려운지 보여주는 명확한 유비적 사례가 된다. 교환영역에서 모든 경제주체들이 자유롭고 평등한 상품소유자로서 마주하는 사회라는 환상에 대해 마르크스는 ‘자유, 평등, 소유, 그리고 벤담…’이라고 비꼰 적이 있다. 교환영역에서 상품소유자들이 향유하는 평등과 자유가 생산영역에서의 불평등과 구속을 은폐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분배영역에 대해서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분배영역에서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기본소득)의 담지자로 마주하는 사회에 대한 환상은 ‘자유, 평등, 기본소득, 그리고… 부루마블’이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자본축적의 욕동을 지속시키는 게임의 룰을 중단시키는 것이지 게임 내에서의 지위를 리셋할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
 

기본소득과 분배영역의 변혁? 혹은 생산영역의 변혁?


  기본소득이란 소득이나 노동 여부에 대한 심사 없이 모두에게 무조건적으로 현금이 지급되는 보편적 복지의 일종이다. 물론 이러한 기본소득에 대한 구상은 옹호자들마다 다르다. 그러나 그 밑바탕에는 보편적 시민권에 기반한 사회적 공화국을 실현한다는 사상이 존재한다. 여기서 기본소득이란 공화국의 시민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권리의 일종이 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모두가 경제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망을 확보할 수 있다는 논리다. 그리고 기본소득론자들은 기본소득이 빈자와 부자를 가리지 않고 지급된다 하더라도 이를 불로소득에 대한 중과세를 통해 실현한다면 사실상 그 어떤 형태의 복지보다 더 급진적으로 소득의 재분배를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미 보았듯이 기본소득의 지급을 통해서 다른 재분배 정책보다 불평등과 소외, 그리고 착취의 문제를 더 잘 해결할 수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여전히 부의 원천을 독점한 자본의 사회적 힘과 권력이 기본소득을 통해 ‘약화’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기본소득이 ‘현금’으로 지급된다는 사실이야말로 기본소득의 강점이자 치명적인 약점이다. 그것이 기본소득론자들이 비난하는 투기적이고 낭비적인 용도로 사용될지, 아니면 그들이 구상하는 보다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는 데 쓰일지는 제도 그 자체로 전혀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투기적 불로소득이나 금융자본에 대한 과세를 통해 재원을 마련하겠다는 주장은 무엇이 투기적이고 비생산적인 자본인지에 대한 구별이 무력화된 오늘날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그 전제부터 의심스럽다. 나아가 기본소득은 자본의 공세에 의해 얼마든지 무력화될 수 있다.

  결국 기본소득론의 관건은 생산영역에서의 변화는 차치하고서라도 교환 및 분배영역에서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이 질문에 대해 완전히 무관심한 기본소득론자들도 있지만, ‘그렇다’고 내기를 거는 쪽은 기본소득이 협동조합과 지역공동체와 같은 대안적인 경제조직을 육성하는 일종의 사회적 기금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데 희망을 걸거나(앙드레 고르), 아니면 그것이 노동시간을 단축시키고 노동조건을 개선시키는 데 도움된다는 논리를 설파(강남훈)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는 희망적 사고가 논증을 대체하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우선 기본소득이 자본주의를 대체할 경제조직과 사회적 소유의 영역을 만들어 낼지, 아니면 새로운 자본주의적 시장과 또 다른 투기적 자본의 먹잇감이 될지는 사전에 장담할 수 없다. 또한 기본소득의 지급이 노동시간을 단축시키므로 노동조건을 개선시킨다는 논리 역시 희망적인 예측에 기반을 두고 있다. 기본소득이 지급되면 노동시장에 대한 공급 압력이 완화되므로 노동시간이 단축될 것이라는 것은 다른 모든 조건이나 변수를 배제한 극단적인 가정에서 도출된 예측일 뿐이다. 예컨대 노동시장에서 추가적인 소득을 벌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질 때, 혹은 안정적인 일자리에 대한 욕구가 강해질 때 일자리를 둘러싼 경쟁은 여전히 지속될 수 있다. 또는 노동시간이 단축된다 하더라도 기본소득이라는 안전망을 구실로 노동의 불안정화와 해고가 더욱 빈번해질 수 있다. 결국 기본소득은 변혁적 의제 내지는 이행 강령이라기보다는 단지 여러 정책적/제도적/대중운동적 변수들과 연동돼야 할 보조적인 정책적 수단에 불과하다.
 

불가능한 삼위일체와 대중운동의 맥거핀


  그러나 한편 정책으로서 기본소득의 신뢰성을 저하시키는 것은 그것이 구체적인 사용가치가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의 화폐로 지급된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상의료, 무상교육, 무상주거와 같은 보편적 복지보다 더 간단하게 무력화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예컨대 기본소득으로 지급되는 통화 및 화폐의 가치를 떨어뜨리면 된다. 이러한 자본의 공세는 반드시 국제적 투기자본의 나쁜 음모에 의해 기획될 필요는 없다. 오늘날 자본이동성이 급격히 증대된 국제자본주의 질서 속에서는 많은 기본소득론이 전제하는 금융자본과 자본소득에 대한 급격한 과세로 인해 대규모의 자본유출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기본소득과 관련한 ‘불가능한 삼위일체’를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 금융자본에 대한 중과세, 기본적 생계수준에 도달하는 기본소득, 그리고 통화가치의 안정성을 동시에 달성하는 것은 어렵다. 예컨대 자본소득에 대한 과도한 세율 인상을 단행해서 급격한 자본 유출이 일어난다면 자국의 통화가치는 하락하고 대중에게 보편적인 생계수단을 제공한다는 기본소득의 취지는 무력화되기 쉽다. 그리고 이때 대중들은 자신에게 지급될 기본소득을 방어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산의 가치를 보전하는 데 관심을 가질 공산이 크다. 분배영역의 변화로 시작된 기본소득이 다른 경제영역의 구조를 선순환적으로 바꾸기는커녕 오히려 분배영역에서의 변화조차 제대로 지켜낼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결론적으로 기본소득은 자본과 대중의 정치적 이해 사이에 진정한 균열을 일으키는 데 큰 효과가 없는 정책이다. 오히려 그러한 정치적 균열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대중들에게 안정적인 일자리와, 보편적인 교육, 의료, 주거복지와 같은 현물복지를 보장하는 편이 더 안전하다. 우리가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정책적 대안을 제출하면서 당장 생산영역에서의 급격한 변혁이나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분배겚냠?망뗌� 진보적 변화라는 차원에만 머문다 하더라도 전 시민에게 지급되는 높은 수준의 기본소득은 그것이 관념적으로 의도했던 변화를 실제로 일으킬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런 경우 결국 기본소득이란 대중운동의 ‘맥거핀’이 될 공산이 높다. 기본소득정책은 차라리 단기간 내에 해소될 수 없는 만성적인 청년실업에 시달리는 계층에게 지급되는 보편적이고 무조건적인 청년 수당이나, 농촌 인구에게 지급되는 농촌 기본소득과 같은 보다 제한적인 영역에서 시행되는 것이 더 효과적이고 대중적인 설득력을 가지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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