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남 / 고려대 강사



  분노하라! 시대적 요청이면서도 극도의 피로감을 안겨 주는 구호가 바로 ‘분노하라’다. 분노는 대체로 파괴적이거나 부정적인 감정으로 분류된다. 하지만 이는 심리학적 담론에서 통용되는 정의이며, 이 담론에서는 체제보다는 개인, 구조보다는 심리, 연대보다는 자아성찰을 강조한다. 그러나 부정의에 대한 분노마저도 파괴적이고 부정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분노는 인간이 사회적 관계 속에서 부당한 대우나 억압을 받았을 때, 자신의 자리를 되찾고 왜곡된 사회구조를 변혁시키기 위한 저항행위의 심리(생물)학적 에너지다. 특히 권력관계에서 자신의 권력이 부당하게 침해를 받거나 상실 위기에 직면했을 때, 분노는 반(半)무의식적으로 표출된다. 분노(resentment)의 의미를 좀 더 명확하게 하기 위해 화(anger)와 구별할 필요가 있다. 화는 개인적 차원에서 발생하는 즉흥적인 노여움인데 반해, 분노는 규범적인 속성을 지닌 집합적 감정이다. 분노는 집합적 공분을 일으켜 저항행위로 이어진다. 실제로 사회운동의 심연에는 이러한 감정동학이 늘 작동해 왔다. 즉 내 일은 아니지만 마치 내가 겪고 있는 것처럼 상황을 공유하면서 침해된 ‘성스러운’ 규범과 가치를 고수하려는 ‘사회적’ 감정이 바로 분노다. 

  여기서 사회적 감정으로서의 분노는 특정한 사회성을 내재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 지금 이 시점에서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에 주목해야 하고, 진보운동세력뿐만 아니라 각 분야의 셀러브러티까지도 대중에게 ‘분노하라’고 들썩이는가? 그동안 우리가 분노를 ‘강요’받아야할 만큼 충분히 분노하지 않았단 말인가. 이와 정반대로 우리는 예전과 다름없이 상당한 정도의 분노를 표출해 왔다. 지난 몇 년 동안 각종 사안에 대한 촛불집회, 비정규직투쟁, 인정투쟁이라는 이름으로 1인 시위까지, 거리와 광장에는 분노의 흔적들이 곳곳에 새겨져 있다. 심지어 사이버공간은 분노의 용광로가 아닌가. 솔직히 말해서 이제 ‘분노하라’의 구호는 흥분보다는 피곤으로 다가온다. 어쩌면 우리는 분노결핍이 아니라 분노피로에 빠져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분노의 사사화와 계급화

  현대사회의 걷잡을 수 없는 공포와 위험은 분노를 유발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분노의 속성을 변화시킨다. 오늘날 우리가 겪는 공포는 발생 원인이 한 가지 요인으로 규명될 수 없는 복잡성을 띠고 있으며, 이는 곧 예측불가능성으로 발현된다. 바우만은 이를 ‘유동하는 공포’로 표현한다. 국가와 시장의 실패로 인해 삶에 대한 안정적인 장기서사가 무너진 오늘날, 우리는 훗날 다가올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미래를 미리 앞당겨 ‘지금’ 고민한다. 공포는 이제 현대인의 무의식이 됐다. 나를 불안과 공포에 빠뜨린 모든 타자에 대한 강력한 감정적 반응은 분노로 나타난다. 불안과 공포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발생한 권력 결핍과 지위 상실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포가 유동적이라는 점에서 분노의 대상은 불투명하다. 이른바 ‘87년 체제’ 이후 민주화와 자본의 세계화가 공존하는 한국 사회에서 분노의 주체가 다양해졌다고 하지만, 실은 모호해졌다고 표현해야 적절하다. 누군가는 ‘다중’을 새로운 분노 주체로 설정하지만 다중 개념만큼 모호하며 즉흥적인 주체도 없다. 동시에 분노의 대상과 지향점 또한 불투명해졌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넘어선 대안체제를 향한 실천은 회의와 냉소를 유발한다. 다만 현재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틀 내에서 발생하는 불협화음이나 불평등에만 주목할 뿐이다. 오늘날 민주주의는 사사로운 것들에 대한 관심을 유발하는 생활정치로 전환되고 있으며, 자본주의는 탈계급화된 소비윤리를 자발적으로 실천하는 자기계발 주체를 생산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은 공포가 내사화되는 결과를 낳게 되며, 분노는 사회가 아닌 자아를 향하게 된다. 즉 불안의 원인은 나에게서 비롯되며, 분노의 대상은 나로 귀결된다. 이로써 분노는 사회규범적 속성을 상실하고 화화(angerization)된다. 결국 현대인은 원인 모를 화와 스트레스를 자주 경험하게 되며, 이는 곧 병리학적 담론으로 포획된다. ‘분노의 사사화’라고나 할까. 그래서 체제변혁이 아닌 ‘치유’가 필요한 것이다.

  오늘날 ‘분노하라’는 중산층의 위기와 맞물려 있다. 90년대 이후 노동시장의 유연화로 인한 해고와 실업, 비정규직화가 일상화되면서 노동자들의 추락한 지위와 생활고는 국가와 시장에 대한 분노로 표출됐다. 여기서 가장 타격을 입은 계층이자 분노의 주체는 중산층이다. 87년 이후 한국사회운동의 핵심세력은 중산층 노동자들이나 ‘배운 사람’ 중심의 시민사회세력이 주도해 왔다. 하층 노동자들의 목소리는 더욱 지하세계로 묻혀 버렸다. 97년 외환위기는 이 같은 진보와 저항세력의 본질을 드러내 주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이들은 중산층이 위기에 봉착하자 ‘분노하라’고 떠든다. 카이스트 학생들이 자살하고, SKY대학 졸업생들이 취업을 못하고, 중산층 자녀들의 대학등록금이 비싸다고 하니 그제야 ‘분노하라’고 한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의 비애와 죽음은 두말할 필요 없이 안타깝지만 이 현상을 대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꽤나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 범주에 해당하지 않는 밑바닥 사람들 혹은 전혀 주목을 받지 못하는 이들의 고통과 죽음은 아주 오래 전부터 계속돼 왔기 때문이다. 다수의 불안정 노동자들은 분노는커녕 생존 그 자체를 위해서만 몰두하는 데도 시간이 모자랄 판이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자본은 이전에 비해 더욱 노동자들의 집합적 저항을 차단하는 교묘한 장치들을 치밀하게 배치하면서 노동자들의 감정적 연대를 차단해 왔다. 이 과정에서 계급 분노는 권력과 이해관계에 따라 순식간에 계급 내 적대로 바뀌기도 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숱한 갈등과 무시의 현장을 돌아보라. 이렇듯 사회양극화는 분노의 주체까지도 ‘계급화’시키고 있다.
 

강요된 분노를 넘어서

  현대 민주주의의 통치 양식을 통해 분노의 생산과 소비메커니즘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분노가 사사화되고 계급화됐다고 해서 분노감정 자체가 저항의 사회적 동력을 상실했다고 볼 수 없다. 문제는 분노감정이 사라진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 의해 어떤 방식으로 표출되고 공유(소비)되는가에 있다. 오늘날 분노는 중산층의 위기담론을 주축으로 생산되고 있으며, 카리스마적 지도자나  정치전문가보다는 셀러브러티를 통해 소비된다. 그리고 분노의 주체는 민중, 노동자, 빈민, 다중, 시민에서 ‘빠’와 같은 팬덤으로 대체되고 있다. 이름 없는 가난한 농민과 노동자의 분신이나 자살 자체보다는 이를 스펙터클하게 재현하는 셀러브러티의 언어와 눈물이 분노를 불러온다. 즉 셀러브러티들이 분노(하라고)해야 ‘빠’들도 덩달아 분노한다. 그런 면에서 ‘나꼼수’와 ‘안철수 현상’ 같은 플랫폼 정치는 전형적인 ‘분노의 셀러브러티화’이다. 셀러브러티 정치가 보편화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은 셀러브러티를 통해 분노를 표출하고 소비한다. 이러한 정치는 다양한 통로를 통해 이른바 ‘참여’와 ‘소통’을 유도하면서 확산된다. 정치전문가들은 오프라인과 온라인을 통해 수시로 참여와 소통을 요청하면서 정치마저도 고객맞춤형 서비스사업의 하나로 만들고 있다. 하루에도 수십만 건의 분노 가득한 이야기들이 전파를 달구듯이, 오늘날 우리는 분노하지 않는 게 아니라 너무 많이 분노하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분노피로는 이런 맥락에서 발생한다. 우리는 자발적으로 분노할 수 없게 된 순종기계, 단지 무대 뒷면에서나 ‘씹는’ 기계로 전락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같은 참여와 소통은 사람들을 유순한 주체로 길들이는 통치기술로 작동한다. 일명 참여 테크놀로지는 분노의 주체를 ‘웃으면서 싸우는’ 주체, 촛불을 든 시민, 트위터 방문객, 콘서트장의 관람객으로 전환시킨다. 역으로 참여와 소통에 소극적이거나 과격하고 폭력적인 행위는 비민주적인 행위로 범주화된다. 이제 분노는 노동자, 농민, 빈민, 사회적 약자가 아니라 팬, 트윗이나 페이스북 친구, 콘서트 관람객의 전유물이 되고 있다. 

  지금 이 시대에 ‘분노하라’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지하고 있다. 특히 MB정권을 거치면서 그동안 지극히 당연해서 묻지 않았던, ‘정의란 무엇인가’,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진정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들은 이 시대에 결핍된 것이 무엇인지 반증한다. 하지만 이제 분노하기에 앞서 다시 물어야 할 것이 있다. ‘정의’를 진정 몰라서 ‘정의’를 되묻는 것인지, 분노할 줄 몰라서 ‘분노하라’는 요청에 따라야 하는 것인지를. 분노는 진정성을 추구하는 주체의 진지한 자기비판을 통해 촉발되며, 이 같은 주체들이 화학적으로 결합해 도덕감정을 공유할 때 집합적 연대가 가능해진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우리를 길들이는 데 활용하는 테크놀로지에 분노하고 저항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주목받지 못한 주체들을 재현하기 위해 저항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묻는다. 분노 없는 저항은 혈액 없는 신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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