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한소 / 문화연구학과 석사수료


 
 

  강조할 것도 없이 한국의 자살률은 ‘자살공화국’이란 명칭에 걸맞게 세계적으로 높다.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해져 경각심이 느껴지지 않는 OECD 국가 중 자살률/자살증가율 1위라는 통계가 그를 뒷받침해 준다. 이렇게 자살 문제가 대두되면서 자살 예방에 대한 담론도 비록 걸음마 단계지만 함께 생성되고 있다. 

  자살예방담론에서 우선적으로 살펴볼 문제는 자살의 ‘의료화’다. 이는 자살을 치료가 필요한 질환이나 장애로 설정함으로써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들을 ‘환자’로 간주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자살은 세로토닌을 포함한 뇌 화학물질의 변화로 인한 증상이 되며, 개인의 ‘마음의 병’에서 기인한 행동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이 ‘마음의 병’으로 호출되는 대표적인 것이 바로 자살을 다루는 언론보도에서 으레 볼 수 있는 ‘우울증’이다. 그러므로 자살률을 낮추기 위해서는 우울증 치료율을 높이는 등 정신의학적 접근에 대한 필요성이 우선적으로 제기된다. 

  더불어 ‘자살하는 사람들’과 ‘자살하지 않는 사람들’의 차이를 연구하는 많은 분석과 결과들은 자살하는 사람들이 삶의 목적이나 의미, 자아존중감이 결여되어 있고, 문제해결능력과 자아탄력성이 낮다는 등의 심리적 특징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심리적 특성은 학습과 훈련, ‘치료’를 통해서 ‘교정’될 수 있으므로 자살 예방을 위해서 이러한 치료 프로그램들을 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자살예방담론에서의 자살은 그동안 그것을 둘러싼 다양한 이론적 접근에도 불구하고 정신의학적, 심리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한 합리적인 설명틀을 갖게 됐다. 그러나 그 명징한 틀 안에서 자살은 ‘병리적 증상’만 부각될 뿐, 자살을 하는 주체는 누구이며 어떠한 이유에서 자살을 선택하게 됐는지 따져 보는 질문은 희미해진다. 

  이러한 자살예방담론에서 지난 6월 보건복지부는 내년부터 전 국민을 대상으로 생애주기별 정신건강검진을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생애주기별 정신건강검진이란 취학 전 아동 2회, 초등생 시기 2회, 중·고등생 시기 각 1회, 20대 3회(20대는 진학·취업·입대 등의 스트레스를 많이 겪는 시기이고 그만큼 자살률도 높으므로 특별히 3회라고 한다), 30대 이후 연령대별로 각 2회씩 실시되는 것으로, 보건복지부는 검진을 통해 국민 스스로가 자신의 정신건강 수준을 확인할 수 있고 자살위험군을 대상으로 하는 조기 치료 또한 가능해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렇게 자살을 의학적 치료나 부정적인 심리적 특성의 교정을 통해 예방할 수 있다는 관점으로 바라볼 때, 이러한 자살예방담론에서 상정하는 주체는 의학적?심리적으로 진단된 병명 안에서 자신의 삶을 ‘치료’하기 위해 책임을 다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주체의 모습을 병리적으로 진단한 특정 주체들만이 아닌 우리 시대 지배적인 주체상의 연장선에서 살펴볼 수 있다고 하면 어떨까. 
 

‘치유’ 혹은 ‘치료’
 

  주지하다시피 요즘 ‘치유’, ‘힐링’ 같은 단어들은 어디 하나 쓰이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유행하고 있다. ‘마음의 감기’로 ‘소울 닥터’를 찾아가거나 심리 상담을 통한 ‘정신건강 컨설팅’을 받는다. 선택할 수 있는 치료법들도 숲 치료, 독서 치료, 웃음 치료, 글쓰기 치료, 미술 치료, 놀이 치료, 명상 치료 등 매우 다양하다. ‘치료’라는 말이 대놓고 붙는 것이 꺼림칙하다면 ‘치유’, ‘힐링’, ‘위로’ 같은 말이 붙은 다양한 상품들이 사람들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이렇게 심리학, 정신의학, 그 외 여러 ‘요법’에 기반을 둔 치유와 위로를 강조하는 문화현상을 통칭해 치유문화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 안에는 약물로 치유하든, 상담으로 치유하든, 유사 종교를 통해서 치유하든, 아니면 다른 무엇으로 치유하든 각기 방식은 다르지만 자신의 자아에 귀를 기울여 스스로 치유하는 주체가 놓여 있다. 

  그런데 자살을 시도하는 ‘중증정신질환자’를 의학적으로 ‘치료’하는 것과 자신의 자아에 귀를 기울여 스스로를 ‘치유’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지 않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치유문화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의 특징이 일반적으로 구분되는 ‘치료’와 ‘치유’의 경계가 모호해졌다고 전제하는 데서 출발하고 있다면 어떨까. 이를테면 ‘치료’는 사회적으로 확립된 정상성의 기준에 따라 질병을 진단하고 성문화된 절차에 따라 환자의 증상을 치료한다는 의학적 의미에서 ‘치료’이고, 비의학적 처치를 통해 나의 고민이나 걱정을 없애고 내면의 부족한 점을 충족시켜 주는 행위는 ‘치유’라고 구분될 수 있다. 그렇다면 앞서 말한 미술 치료?음악 치료?독서 치료 같은 각종 서비스들은 ‘치료’라는 이름을 갖고 있음에도 그것이 실질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치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psychotherapy'를 정신의학에서는 ‘정신요법’으로, 심리학자들 및 그 외 분야에서는 ‘심리치료’라고 번역하는 알력은 차치하고서라도, 이러한 치료/치유의 혼용은 시중에서 판매되는 심리치료 서비스의 명칭에서도 나타난다. 같은 프로그램을 두고 어떤 업체는 ‘심리치료’라는 명칭을, 다른 곳은 ‘심리치유’라는 명칭을 쓰는데 이는 ‘치료’라는 말에서 풍기는 비정상적이고 병리적인 악취를 제거하고 ‘병리적’인 사람이 아닌 일반인들도 ‘향유할 수 있는 문화’라는 점을 어필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이 점을 전제한다면 앞서 말한 자살예방담론에서 자신의 삶을 치료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과 ‘템플 스테이’를 통해 ‘참 나’를 발견하고 ‘치유의 심리학’ 서적을 읽으며 자신의 가능성을 믿고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애쓰는 사람과의 거리를 좁힐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치유’라는 이름을 가진 자기계발의 개작이라는 시선을 통해 조망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치유담론의 확산과 영향력은 앞서 말한 ‘치유의 심리학’ 같은 서적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업에서 직원들의 정신건강을 위해 직장 내 심리상담소를 증설하고, 노숙자에게 ‘심신치유’ 프로그램을 통해 ‘자활의지’를 고취시키며, ‘자살 고위험군’인 실직자와 쪽방 거주자를 대상으로 우울증 선별검사를 시행하는 영역에서도 이는 드러난다. 즉 정리하면 치유담론은 일상생활의 의료화와 심리화를 매개하고 있으며, 이는 자신을 치유?향상시키기 위해 애쓰는 주체와 짝을 이루고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기업에서, 국가에서, 다양한 사회의 영역에서 치유담론을 동원함으로써 어떠한 효과를 도출하거나 가정할 수 있을까?
 

‘따뜻한 금융’이 만든 힐링 다리
 

  지난 9월, 5년 동안 85명이 자살해서 ‘자살 다리’로 유명한 마포대교가 ‘힐링 다리’로 다시 태어났다고 한다. 다리 위에는 “너 고민 있구나?”, “밥은 먹었어?” 같은 문구가 설치돼 있고, 다리 중간에는 ‘생명의 전화’를 설치해 바로 상담을 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그리고 보다 극적으로 자살 방지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보행자의 움직임을 감지한 센서를 통해 이러한 메시지가 부착된 전등이 자동으로 켜진다고 한다. 이러한 문구는 투신자의 심리를 체계적으로 분석한 심리학자, 광고회사 등에 의해 고안된 것이고, 이를 서울시와 함께 설치한 것은 삼성생명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이 다리가 비단 자살 예방의 다리가 아니라 시민들이 찾을 수 있는 ‘힐링 명소’로 만들어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줄 수 있기를 기대한다. ‘따뜻한 금융’을 표방하는 삼성생명 사업의 일환으로 설치된 다리를 보며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높은 자살률로 인해 매년 보험회사의 자살보험금 지급 건수가 늘고 있다는 것과 이에 여러 보험회사들이 자살예방교육과 정신건강증진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혹독한 자본주의 안에서 탈락한 사람이 생을 마감하기 위해 오르는 ‘따뜻한 금융’이 만들어 놓은 다리. 그 힐링 다리는 과연 누구를 위한 다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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