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아 / 문화연대 활동가

 

  2009년 용산참사의 현장에는 어둠과 절망과 슬픔이 번져 그 전체를 먹구름으로 덮어버리고 있었다. 붉은 화마는 남일당 건물 옥상 망루만 쓸고 지나간 것이 아니었다. 재개발 3구역 전체와 용산, 그리고 서울을 넘어 전국을 검게 그을려 버렸다. 참사 당일 아침 시각예술 작가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현장으로 달려왔다. 역할을 나눈 것도 아닌데 걸개그림을 그리고, 대형 현수막을 건물에 걸고, 현장에 나뒹굴던 가재도구들을 모아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검게 그을린 공간에 흐릿하게 색이 입혀지고 함께 달려온 사진작가들은 참사 이미지를 카메라에 담아내기 시작했다. 이들의 작업은 언론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고 삼삼오오 시민들의 발걸음도 늘어갔다. 용산참사 현장은 문화예술인들의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곳이다. 영역과 분야를 망라한 거대한 문화예술 공간이라 불릴 만큼 문학, 미술, 음악, 미디어, 연극 등 참사를 알리고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가 진행된 삶과 투쟁의 장소이기도 하다.
 

  용산참사 현장의 기획은 또 다른 행동을 파생시켰다. 꼬리에 꼬리를 문 네트워크는 그곳을 전시장으로, 공연장으로, 교육장으로 만들어 냈고 시각미술인들은 이때부터 스스로를 ‘파견미술인’이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파견미술은 노동의 가장 열악한 형태인 파견노동에서 그 어원을 찾았다. 작가들은 노동현장과 철거현장에 스스로를 파견해 현장에서 연대를 만들어 내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해 세상을 들썩이게 만든 한진중공업 사건은 문화예술인들의 머릿속에도 맴돌고 있었다. 35미터 크레인 위에서 홀로 꿋꿋하게 싸우던 여성 노동자(김진숙)의 이야기는 뭔지 모를 부채감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끌었다. 그 여성 노동자는 자신이 크레인에 올라가기 몇 년 전, 같은 크레인에서 동지(故 김주익) 한 명을 하늘로 보낸 경험이 있다. 크레인 농성 129일 만에 자살이라는 극단의 방법으로 세상을 향해 외쳤던 “부당정리해고”는 그가 죽은 지 몇 년 후에도 여전히 냉혹한 현실로 존재한다. 어느 날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는 말했다. 한진중공업 크레인 농성 현장에 연대를 가야겠다고, 정리해고의 문제는 우리 모두의 문제라고 이야기하면서 희망을 만들어 보자고 했다. 자신의 문제로만 이야기하면 노동자의 투쟁은 고립될 수밖에 없다며 연대의 버스를 만들어 보자고 했다. 
 

 
 

  파견미술팀은 다시 뭉쳤다. 미술에 국한시키지 않고 영역을 더 넓혔다. 이제는 파견 ‘예술인’이라 불러야 한다. 미술작가, 사진작가, 영상작가, 문학인 등 다양한 예술인들은 김진숙이  농성을 시작한 지 100일이 되는 날 크레인 아래 모였다. 10여 미터가 넘는 걸개그림을 바닥에 펼치고 김진숙을 향해 외쳤다. “힘내세요! 사랑해요!” 그녀는 힘차게 손을 흔들었고 작가들은 함성을 질렀다. 그녀의 크레인 농성 100일은 파견미술팀과 함께였다. 걸개는 35미터 크레인에 걸렸고,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은 이를 배경으로 사진 찍기 놀이를 했으며, 파견미술팀에 속한 사진작가는 셔터를 누르며 미디어 매체를 통해 세상과의 소통과 연대를 호소했다. 희망버스를 타고 달려와 달라고 말이다.
한진중공업 공장은 배를 만드는 곳이다 보니 여기저기 파이프와 쇳조각들이 널려 있었다. 조각하는 작가는 이 쇳덩이들을 모아 용접을 전문으로 하는 한진 노동자 아저씨와 함께 설치물을 만들었다. 파견미술작가들의 특징 중에 하나가 현장에서 소재를 찾고 그것을 이용해 현장에 어울리는 설치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공공미술이 아닐까.
 

  그렇게 멋진 밤을 보내고 1달 뒤 희망버스는 수백, 수만의 사람들과 함께 35미터 크레인 아래로 모이기 시작했고, 그녀는 크레인에 오른 지 309일 만에 땅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희망버스의 과정을 살짝 이야기하자면, 처음 기획 단계에서 1박2일 농성연대를 한다는 것은 무척 고민이 되는 게 사실이었다. 사람들과 어찌 소통해야 하나, 크레인 위의 그녀를 보며 그저 신나게 놀기만 해도 되는 걸까, 그녀를 위로하고 세상에 정리해고의 문제를 알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많은 고민 끝에 프로그램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희망버스 타실 분~”, “신나게 놀아줄 분~”, “밥을 나누어 주실 분~.” 인터넷을 통한 소통의 목소리다. 사람들은 답하기 시작했다. 밥을 만들어 오겠다고, 노래를 불러 주겠다고, 춤이라도 추겠다고… 그리고 사람들은 이야기했다. 그녀에게 희망을 만들어 주자고, 세상에 부당해고의 불합리함을 알려 보자고, 더 이상의 죽음은 막아 보자고 말이다. 기획자의 역할은 없었다. 사람들 모두가 기획자였고, 행동주의 작가들이었다.
 

  행동주의는 소수의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것이라기보다 현장에서의 어우러짐을 위해 작가들이 매개가 되어 소통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행동주의는 점점 진화하고 있다. 어떤 작가들은 콜트겺墳� 기타를 만드는 노동자들과 연대해 공장을 점거했고 다른 작가들은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 투쟁에 연대했으며, 또 다른 작가들은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투쟁에 함께하고 있다.
일상성에 기반한 행동주의의 확장은 거시적 층위에서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과 폭력에 대한 사회적 성찰과 자율적 대안 모색의 전환점이 된다. 또한 미시적인 층위에서는 자본주의의 생산력주의가 일상적으로 강요하고 있는 반생태, 반문화적 폭력과 다르게 자율적이고 성찰적인 예술행동을 바탕으로 삶의 자기 완결성을 증가시킬 수 있는 새로운 계기가 될 수 있다. 행동주의는 사회-삶의 대안을 만드는 가장 기초적인 연대이며 예술의 공공성을 사회적으로 확장시켜 삶의 질을 높이고 내면화된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핵심적인 경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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