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환 / 다중지성의 정원 대표

  <편집자 주> 시대는 삶과 예술을 통합하고 창조적인 삶을 추구하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예술은 삶과 통합되기보다 산업 또는 자본과 결탁하기도 한다. 본 기획에서는 오늘날 예술이 자신의 경계를 얼마만큼 무너뜨렸으며 어떠한 방식으로 우리 삶에 침투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① 호모아티스트로 살기   ② 크로스오버, 예술과 디자인  ③ 사이버 공간에서 유목하다  ④ 현장에 살어리랏다  ⑤ 치유하는 예술
 

 

 
 
 

오늘날 사회 곳곳에 산포된 대학들은 인지적인 것을 생산하고 유통하고 소비하는 인지공장들이며 대학체제는 하급 교육기관들, 입시학원들, 연구소들, 출판사들, 언론방송사들, 통신사들, 기업들, 그리고 국가기구들 등과 연계된 인지복합단지를 구성한다. 이 속에서 학생과 교수들은 이들을 가동시키는 노동자와 관리자로 기능한다.
  인지공장체제는 사회가 요구하는 인지적 노동력을 생산하고, 사회가 소비할 인지적 생산물을 생산하는 등 비교적 전통적인 것으로 보이는 기능을 지속하고 있다, 하지만 이전과는 명확히 다른 또 하나의 기능을 수행하는데 그것은 채무자를 생산하는 것이다. 학생들에게 주어지는 신용복지라 할 수 있는 학자금대출은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문턱을 낮춘다. 그래서 대학을 엘리트 기관이 아닌 대중적 기관으로 전화시킨다. 대중-학생들은 수년의 대학(원) 생활 동안 비임금의 노동을 수행하지만 졸업 후에도 대개는 비임금의 노동을 지속하거나, 비정규의 임금노동에 종사하게 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졸업 전과 후에 차이가 있다면 졸업 전에는 상환의무를 유예 받은 잠재적 채무자이지만 졸업 후에는 상환강제에 시달리는 실제적 채무자라는 점이다. 실제적 채무자가 되면 채무상환이 그/녀의 삶을 규제하는 가장 직접이고 실질적인 명령으로 작용한다.


  졸업한 학생, 즉 청년들이 상환해야 할 거대한 채무의 총체는 금융자본에 담보 잡힌 그/녀들의 미래시간이다. 학업(즉 지식노동)을 수행하는 노동자에게 임금을 주기는커녕 등록금을 받는 마이너스 임금제도와 이것의 모순을 가리기 위한 각종 부채복지제도를 통해 전 세계의 청년들은 채무자로, 금융자본의 노예로 생산된다. 이 예속적 상황이 낳는 결과는 엄청나다. 일부 청년들이 생존을 위해 다른 청년들의 저항행동을 진압하는 용역이 되면서 나타나는 세대 내 분열, 불안과 우울의 일반화, 자발적 고립과 은둔 및 자살, 그리고 심지어는 무차별적 다중살인 등이다. 미디어와 권력은 청년세대의 이러한 반응들을 화려한 이미지들로 은폐하거나 병리현상으로 예외화하거나, 치안의 표적으로 삼는다.


  사회주의의 붕괴를 전후해 터져 나온 봉기들, 예컨대 카라카스 봉기(1989)와 로스앤젤레스 봉기(1992), 그리고 사빠띠스따들의 봉기(1994)가 일시적 투쟁 형태가 아니었음은 아르헨티나 삐께떼로 투쟁(2001), 프랑스의 방리외 봉기(2005), 그리고 2008년의 금융위기 상황에서 런던과 그리스에서 터져 나온 봉기들의 지속을 통해 드러난다. 봉기는 제3세계적 투쟁 형태를 넘어 제1세계에서의 투쟁 형태로 확장되며 유색인들을 넘어 백인들에게로 확산된다. 2011년 몰락 위기의 중간층과 빈민 청년들이 주축이 돼 북아프리카에서 중동과 유럽을 거쳐 북미로 바통을 넘기며 일으킨 봉기와 점거의 물결은 금융자본에 예속된 청년들이 다른 형태의 삶을 욕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의 즉각적 실현을 행동으로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태다. 그것은 한국에서 2008년의 촛불봉기를 통해 드러났다.


  오늘날의 봉기는 무엇보다도 금융자본의 무한 축적 욕망을 채우기 위한 화폐적 상환명령에 대한 지불 거부이다. 또한 세계에 대한 기괴한 그림을 그려내는 미디어의 기호적 포획체제로부터의 도주이고, 1%의 안전을 위해 99%를 치안대상으로 삼는 권력에 대한 항의이기도 하다. 한 사람을 지배자로 만들기 위해 나머지 모든 사람의 권리를 약탈하는 대의적 민주주의에 대한 순응 거부이다. 이 항의, 거부, 도주의 운동 속에서 서울, 타흐리르, 솔, 신타그마, 주코티 등의 광장들이 제도 공간에서 해방의 공간으로 바뀌었고, 정보마디로 연결돼 있지만 신체적으로는 격리돼 있던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져 춤을 추었다. 민주주의의 대의화, 수량화, 정보기호화를 대체하는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민주주의의 감수성이 폭발한 것이다. 일련의 봉기들과 점거들은 채권채무관계가 인간들 사이의 실질적 상호의존관계와 연대관계로 대체돼야 하고, 재산의 안전이 아니라 삶의 안전이 중요하며, 그리고 스크린에 비친 스타의 얼굴 대신 살아 있는 친구의 얼굴을 마주보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모두에 대한 한 사람의 지배가 가져온 위기는 오직 모두의 자기지배(민주주의의 실질화와 절대화)를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봉기는 이른바 빚쟁이, 패배자, 일탈자, 외톨이, 약탈자, 폭도, 범죄자, 정신병자, 살인자 등의 낙인에 시달리는 청년들이 다른 세대와 함께 인종차이와 문화격차를 넘어, 서로 어깨를 걸고 만들어낸 전 지구적 예술실천이자 거대한 집체예술작품이다.


  이 사건을 통해 지구행성 전체는 배우와 관객의 경계가 소멸된 극장으로, 생생한 창조의 행동들이 공연되는 확대미술관으로 탈바꿈했다. 지금까지 스펙타클의 구경꾼이었던 사람들이 위대한 작가, 연출자, 배우, 화가, 음악가로 재탄생했다. 이 순간이야말로 삶으로부터 분리돼 직업으로 경직되고, 노동으로 강제되며, 가격을 통해 평가됐던 예술이 분업성겚뮐梔틒전문성을 떨쳐버리고 공통적인 인간활동으로 되는 시간, 즉 예술 자체로 귀환하는 사건의 시간이 된다. 이 시간을 통해 예술은 단순한 경제적 행동이기를 멈추고, 삶과 동의어인 예술의 자기행동으로서 새롭게 시작된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거시 수준에서의 이 예술사건은 언제나 미시수준에서의 지각들, 기억들, 직관들, 감정들, 상상들, 판단들, 결정들, 행동들의 일상적 봉기들의 누적과 참여적 결합에 의해 부단히 준비되고, 거시적 봉기는 미시적 봉기들이 출발할 새로운 평면을 제시한다는 사실이다. 소외된 삶의 자기 복귀를 가져오는 예술의 자기 복귀는 이런 방식으로 무한히 다르게 반복되는 예술적 과정의 엑스타시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문제는 삶을 늘 예술로써 살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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