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석 / <복음과 상황> 편집위원


  오랜 기간 한국교회는 한국의 근대화 과정과 궤를 같이 해왔다. 이는 한 면으로 근대화의 모델(이자 한국의 욕망의 대상)로서 미국과 연결된다. 한국교회는 미국과 한국의 가교 역할을 수행했다. 교회가 선포하는 복음의 내용은 현세의 가시적 구원과 내세의 비가시적 천국이다. 그런데 후자, 즉 눈에 보이지 않는 천국을 어떻게 이해하고 수용할 것인가? 비가시적 대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특정한 가시적 표상을 경유하지 않을 수가 없다(이것이 바로 성례가 존재하는 이유이다). 한국교회가 이해하는 천국의 표상은 바로 미국이다.

  다른 한 면으로, 한국교회는 근대화의 견인차로 기능했다. 일제강점기에도 일정 부분 그러했지만 무엇보다도 박정희 이후 진행된 개발독재와 한국교회의 급성장은 궤를 같이 한다. 이는 6-70년대에 상경한 이들이 부딪치는 새로운 상황에 대한 적응과 치유의 공간으로 교회가 모습을 드러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개발독재 시기에 국가의 성공을 위해 개인의 희생을 전제하는 일정한 기율이 전국가적으로 내면화됐다. 당시 한국교회는 이러한 신념에 동의하고, 교인들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수용하도록 교화했다. 사실 개신교적 신앙 주체는 자본주의적 노동 주체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해에 대조동에서 교회를 설립한 조용기와 박정희의 유사성은 주목할 만하다. 일단 박대통령의 집권기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부흥기가 상당 부분 중복된다. 그리고 둘의 리더십 양태와 목표가 동일했다. 박정희의 새마을운동과 조용기의 삼중 축복(번영신학)은 한국의 빈곤을 전제하며, 물량적 성공을 의도했다(더욱이 조용기의 주장에 따르면 그가 박정희에게 ‘새마음운동’을 제안했고, 그것이 ‘새마을운동’으로 탈바꿈했다). 한강의 기적과 세계 최대의 교회는 이렇게 하나로 만나게 된다. 박정희와 조용기는 각기 한국정치와 한국종교에서 성공신화의 상징이 됐다.

비텐베르크 대학교 내 교회 입구에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한 루터
비텐베르크 대학교 내 교회 입구에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한 루터


한국 보수의 축도로서의 한국교회

  이러한 맥락 안에서 한국 근대화의 양태가 한국교회 안에 압축적으로 재현됐다. 한국의 경제가 급속하게 발전하던 당시에는 한국의 교회도 역시 급속하게 성장했다. 80년대가 그 정점이었다. 또한 재계에는 재벌기업이, 교계에는 대형교회가 등장했다. 한국 경제의 정체는 그대로 한국교회 성장의 답보상태로 이어진다. 한국 사회의 양극화가 진행되면서 중산층이 소멸해가는 상황 역시 한국교회에 그대로 반영된다. 소망교회나 온누리교회와 같은 일부 대형교회의 성장은 가속화되면서도, 중형교회는 사라지고 소형교회가 다수를 점하고 있는 상태이다. 이는 로버트 머슨이 말한 마태효과(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마태복음 13:12)에 다름 아니다.

  상황이 이러하므로 한국 사회의 위기는 곧 한국교회의 위기이다. 그런데 이러한 위기 상황의 체감 정도가 남달리 심각한 이들이 바로 보수세력이다. 특히 교회는 보수세력의 중심이다. 그렇기에 김대중 주필은 한국 보수의 보루로 군대와 교회를 호명했던 것이다. 한국의 보수교회는 과거에 교회와 사회가 독점적 제휴관계를 맺고 있던 황금기, 즉 일종의 기독교왕국(christendom)의 시기가 있었던 것처럼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가정하고 있다. 특히 개발독재 당시 군사정권에 야합해 성장한 대형교회들을 이끄는 큰 목사님들이 그러한 판타지를 가지고 있기에 이들의 상실감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이렇듯 한국교회의 왜곡된 정신세계와 큰 목사님들의 돈과 권력(+α)을 향한 순수한 욕망을 반영하는 판타지가 우리의 현실에 개입하고 있는 상황에서 알아야 할 사실은 큰 목사님들과 그들의 영향하에 작동하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한국교회를 과잉대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의 목소리는 한국의 보수적인 지배계급을 대변하는 것에 불과하다. 마르크스가 말하지 않았던가. 한 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라고. 우리 사회와 교회를 지배하는 소음을 뚫고 그 이면을 들여다봐야 한다. 대부분의 시민과 교인들은 현 상황의 부당성을 알고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개인에 의한 시스템 변혁의 한계에 대한 좌절일 뿐이다

한국교회의 준거로서의 종교개혁

  이러한 시점에서 한국교회는 어떠한 선택을 해야 할까? 이와 관련해 도움을 얻기 위해 유럽의 종교개혁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성서를 강의하던 루터는 중세 가톨릭의 부패에 대한 자신의 비판적 성찰을 95개의 조항으로 담아 게시했다. 그의 의도는 일개 학자로서 자성을 촉구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그러나 이에 앞선 두 가지 혁명, 즉 구텐베르크로 말미암은 인쇄혁명과 르네상스로 인한 교양혁명으로 인해 그 짧은 팸플릿은 온 유럽에 혁명의 메시지로서 확산됐다. 애초에 95개조 반박문을 통해 돈으로 용서를 사는 면벌부를 질책하던 루터는, 나아가 사제중심에서 만인사제직으로 전환할 것을 선언했다. 종교선택의 자유가 없던 유럽인들로 하여금 스스로 적극적으로 선택하는 종교적 주체로 거듭날 것을 주장한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에 필요한 것은 한국사회에 필요한 것과 동일하다. 지금 상황에서 교인들은 루터의 만인사제론에 새로이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들의 비판적 성찰과 자율적 판단이 요청된다. 지배계급의 프레임 속에서 움직이는 시민의 정치적 주체로서의 각성과 보수교회의 세계관 안에 속박돼 있는 신자의 종교적 주체로서의 소생은 논리적으로나 구조적으로나 상동한다. 더는 한국의 대형교회와 큰 목사들에게 교회의 주도권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 교회의 헌법과 정관을 개혁하고, 소위 평신도의 권리와 책임을 강화해야 한다.

  목회자들은 대형교회로의 성장을 향한 욕망을 포기하고 건전한 중소형교회를 추구해야 한다. 현세적 욕망을 따라 무한 팽창하는 대형교회는 종교적 악성종양이며, 모든 구성원의 기능적 역동성을 강조하는 성서의 교회상과 구별된다. 한국의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착취하듯이 한국의 대형교회가 또한 중소형교회를 압도하고 있다. 현재 한국교회의 70%가 미자립교회인 것으로 추산된다. 일본과 대만의 경제를 튼튼한 중소기업이 떠받치듯이 중소형교회, 특히 중형교회가 한국교회를 지탱해야 할 터인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동일 지역에 난립하는 소형 체인점들로 인해 이익이 감소하듯이 무분별한 교회 개척으로 인해 출혈 경쟁이 발생하고 있다. 그러므로 구역별로 개척에 제한을 둬야 하며, 개척 시에 교파에서 재정을 지원해야 한다.

  또한 한국교회의 재정과 동력을 예배당 건축에의 열정이 잠식하고 있다. 대형교회가 부동산 매각으로 엄청난 시세차익을 얻고, 지역교회의 커뮤니티를 통해 부동산 정보가 공유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는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것이 토건경제이고, 부동산의 유무가 계층적 구분의 표지가 되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부자교회와 부자교인은 대체로 땅부자이기도 하다.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에서 영광의 신학 대신에 십자가의 신학을 선포했다는 것을 기억하라. 이는 교회가 화려한 성당 건축 등 업적 달성에 열을 올리는 것에 대한 책망이고, 한국교회에 대한 예언자적 비판이기도 하다. 이는 소비 주체로서 자신을 규정하고 있는 한국 시민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경제적 위기 앞에서 참고할 메시지이기도 하다.

  이제껏 보았듯이 한국교회는 한국 사회의 축도이다. 하지만 현재 시점에 드러나는 한국교회는 한국의 어두운 면을 과도하게 드러내고 있다. 가령 현 대통령과 18대 전 국회의원의 66%가 기독교인이지만, 그들의 신앙은 사회적 순기능을 하고 있지 않다. 지금 한국교회는 급속하게 양극화돼 가는 한국의 선두주자일 뿐이며, 대형교회는 그저 슬럼가 위에 구름을 뚫고 우뚝 솟은 타이렐 기업의 빌딩과 같은 지배계급의 종교적 위무를 위한 제사장으로 복무하고 있을 뿐이다. 이대로 간다면 한국교회는 한국사회와 더불어 급격히 침몰하게 될 것이다. 한국사회의 변혁을 위한 견인차 노릇을 하기 위해서라도 한국교회의 개혁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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