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묵 / 음악평론가


 
 

  민중은 한이 많다. 그러나 억눌린 상태에서 그 한을 대놓고 말하기란 쉽지 않다. 이때 노래는 좋은 수단이 된다. 노래를 통해 두려움, 놀람, 미움, 사랑 등의 정서를 나타낸다. 민중의 염원이 깃드는 것이다. 이러한 감정을 나타낼 때에는 즉각적인 것보다는 계산되고 통제된 수법을 활용한다. 이로써 사회를 비판하고 민중의 권리를 요구한다. 이렇게 노래는 저항의 아이콘이자 '침묵하는 다수의 목소리'가 되는 것이다.

  ‘나의 삶에 감사합니다 / 내가 눈을 떴을 때 흑과 백, 하늘의 많은 별들 / 많은 사람 중에서 내 사랑하는 이를 구별 할 수 있는 / 빛나는 두 눈을 준 나의 삶에 감사합니다 / …… 어머니, 친구, 형제 그리고 내 사랑하는 이의 영혼의 길을 비춰주는 빛과 / 그들을 생각하고 전하는 말과 문자 / 그 많은 것을 준 나의 삶에 감사합니다’ <나의 삶의 감사합니다> 칠레의 빅토르 하라(1932-1973)가 쓴 이 노래는 눈, 귀, 언어, 생각에 드리는 생명찬가이다. 정치적 종속과 경제적 착취에 신음하던 어느 날 저녁,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들은 길거리로 나섰고, 돌아오지 않는 가족을 찾으며 노래를 불렀다. 

  '새로운 노래'라는 의미의 누에바 칸시온 운동은 1950년대 후반부터 칠레와 아르헨티나에서 싹텄다. 민속문화에 대한 연구와 채집, 보급을 중심으로 시작된 민족문화운동이다. 이는 자신들의 문화가 유럽에서 이식된 것이 아니라 잉카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자각으로 이어졌다. 누에바 칸시온은 민속음악을 현대화했고, 곧 좌파 운동과 연관을 가졌다. 이어 중남미 스페인어권으로 확산됐으며, 1970년대에는 남미 민족운동의 큰 줄기로 성장했다. 새로운 노래들이 만들어지고 민중들은 이 노래를 부르며 독재에 저항했다. 

  1973년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는 빅토르 하라의 창작능력을 두려워했다. 그들은 하라의 기타 치는 손을 부러뜨리고 산티아고 경기장에 구금한 후, 궐석재판을 통해 처형했다. 죽기 전 그는 이렇게 노래했다. '저들은 계획을 칼날같이 수행해 나간다. 저들에게는 피가 훈장이다… 침묵과 비명만이 담겨 있는 것이 내 노래의 끝이다…' 

  이러한 실마리는 아르헨티나의 아타우알파 유판키(1908-1992)로부터 비롯된다. 그는 스무 살 안팎의 젊은 시절을 안데스 일대의 노래와 시, 춤, 민속문화를 발굴하는 일에 바쳤다. 그는 대륙의 희망과 꿈을 노래한 '길 위의 시인'이었다. 이 자료는 훗날 누에바 칸시온의 밑거름이 된다. 그의 기타는 총이었고, 노래는 총알이었다. '어제의 부드러운 진실이 오늘은 잔혹한 거짓말로 변했네… / 나는 긴 밤을 지새우며 새벽의 여명을 기다리네 / 이 밤은 왜 이다지도 길으냐 / 기타여, 네가 말해다오' <기타여, 네가 말해다오> 그는 살아생전 여덟 번이나 억류되고 감금됐다. 

  칠레의 비올레따 빠라(1917-1967) 역시 누에바 칸시온의 정신적 거목이다. 그녀는 칠레의 민속음악을 재발견했으며 남미 스페인어권 전역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아르헨티나의 메르세데스 소사(1935-2009)는 1981년 공연에서 청중들과 함께 체포돼 아르헨티나에서 추방되고, 스페인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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