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은정 / 문학평론가

 
 

도대체 너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혼자서 조용히 중얼거리게 되는 이 질문은 고요해 보이는 표면과는 다르게 그 핵심에 전쟁터와 다름없는 격렬함을 지니고 있다. 그 질문은 결국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결정하는 정체성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너를 이해하는 일은 나에 대한 이해와 결정적으로 분리되지 않는다. 정체성과 연관된 전쟁은 우리 주변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매일같이 반복적으로 여전히 진행 중이며 나를 제외한 모든 타자들과의 모든 관계 속에 내재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동성애와 관련된 성 정체성의 문제 역시 여기에 포함돼 있다. 가장 격렬하고 자극적으로 제시되곤 하는 이 주제는 언제나 그것이 우리가 매일같이 경험하는 일상적 정체성들 중의 한 형태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색다르고 특정한 사안인 것처럼 다뤄지기 때문에 언제나 핵심을 벗어난다.

그러나 앨리슨 벡델의 <재미난 집>은 ‘도대체 아버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근본적인 질문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이 질문의 답을 찾아다니는 동안에 이 책의 부제인 ‘어느 가족의 기묘한 이야기’가 도출된다. 이때 “기묘한”이라는 표현이 첨가되는 것은 아버지를 이해하는 필수적인 요소가 성 정체성의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이 구조는 매우 중요한데, 주인공에게 아버지의 성 정체성은 한 존재를 구성하는 모든 다른 요소들과 별개로 독립돼 다뤄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이루는 한 요소로 다뤄지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비밀이 밝혀지는 과정은 의미심장하다. 주인공은 부모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신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알리지만, 결국 그 사실이 아버지의 오래된 비밀을 알게 되는 계기가 돼 도리어 부모님이 숨겨왔던 사실들의 핵심으로 끌려들어가게 된다. 이때부터 주인공의 아버지에 대한 이해는 본격적으로 자기 정체성과도 떼어놓을 수 없는 전면적인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주인공은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아버지의 끝이 나에게는 시작”이며 “아버지의 거짓이 막을 내림과 동시에 내 진실이 밝혀지기 시작했다는 뜻”이라고. 아버지에 대한 이해가 자신에 대한 이해로 변주되는 과정에 접어들면 이 이야기는 단순히 “아버지를 동성애를 혐오하는 시대의 비극적인 희생양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감동적인 편법”을 벗어나게 된다. 그 편법은 편리하고 게다가 도덕적으로까지 보이겠지만 가장 근본적인 문제들이 발생한다. 우선은 아버지가 자신에게 주었던 상처들과 관련해 “아버지를 비난하는 일이 더 어려워질 테고,” 또한 “만일 아버지가 젊었을 때 동성애자임을 밝혔다면, 또는 우리 엄마를 만나 결혼하지 않았다면” 주인공은 태어나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 편법이란 주인공 자기 자신을 완전히 부정하는 일로 귀결될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통찰할 수 있는데, 사회적으로 비정상적인 것으로 규정되는 특성을 지니는 요소를 스스로가 지니고 있다고 판단하게 되는 경우 그 정체성은 ‘수치스런 비밀’의 형태가 돼버린다는 것이다. 주인공은 아버지가 일생동안 집 꾸미기에 매달린 것이 아버지의 수치심을 감추기 위한 것이었다고 이해한다. 또한 주인공은 열세 살 때 레즈비언이라는 단어의 뜻을 사전에서 알게 되자 그 후로는 늘 양심의 가책을 느껴왔다고 고백한다. 즉 동성애는 언제나 비밀스러운, 감춰져야 하는 정체성을 강요한다. 퀴어(queer)라는 명명 자체에 드러나듯 ‘정상적인 궤도에서 벗어난 이상함’이라거나 ‘수상함’, 심지어 ‘가짜’라는 뜻이 포함돼 있다. 어쩌면 주인공이 유년기에 강박 증세를 경험했던 것 역시 바로 그러한 사회적으로 강요된 비밀스러움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 때문에 주인공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도 “바로 옆에서 아버지가 함께 했던 순간에도 아버지가 부재한다고 느꼈”을 것이다. 주인공이 아이였던 시절, 잠들기 전 할머니에게 듣던 아버지의 어린 시절 일화는 이에 대한 강렬한 상징이다. 누군가 건져줄 때까지 그저 가만히 진흙 속에 빠져 있어야만 했던, 아직은 아버지가 아닌 아주 작은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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