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도훈 / 문학평론가

 
 

얼마 전 나는 한 러시아 예술가가 실제 사진에 포토샵을 응용해 만든 <아포칼립스 이후의 삶 Life after the Apocalypse>(블라디미르 마뉴인, 2010-사진)이라는 그림 연작을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다. 흔히 볼 수 있는 UFO 합성사진처럼, 이 연작은 크게 신기로울 것도 보잘 것도 없는 작품이었다. 풀로 뒤덮인 녹슬고 구부러진 고층 빌딩들, 그 아래를 걷는 침울한 생존자의 쓸쓸한 그림자, 파국을 알리는 핏빛 황혼의 이미지 등등. 그런데 국내의 한 신문이 이 그림의 연작을 이야기하던 중 건물 정면에 흐릿하나마 LG광고가 부착된 그림에 주목하면서 꽤 재밌는 코멘트를 남겼다. “지구의 마지막 날까지 LG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진 기업이 될 것이라고 예견하는 것일까?” 기자의 첨언에 의하면 <아포칼립스 이후의 삶>은 자본주의마저 끝내버리는 세계의 종말을 그린 그림이 아니라, 오히려 ‘지구의 마지막 날’까지 계속될 자본주의의 건재함을 예언하고 과시하는 그림이 되는 셈이다. 나는 다소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이 해석이 어떤 핵심을 건드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세계의 종말인가, 자본주의의 종말인가. 자본주의는 세계의 종말과 더불어 사라지는 것인가, 자본주의의 종말이 곧 세계의 종말인가. 세계가 끝나면 자본주의도 끝날 것이라는 저 환상적인 그림의 살 속에 ‘세계는 끝나더라도 자본주의는 영원하리라’라는 충동의 맥박이 오히려 뛰고 있었던 것. 여기서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기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기를 택한다는, 세계 종말에 대한 상상의 각종 문화산업은 자본주의(의 종말)이라는 ‘실재’를 체계적으로 회피하려는 무능력의 상징이라는 프레드릭 제임슨의 교훈을 어떻게 떠올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 시대에 유행하는 수많은 아포칼립스의 문화산업이 도리어 자본의 유토피아를 두둔하고 있다는 이 역설! 자본이 이른바 ‘창조적인 파괴’를 통해, 주기적인 공황과 파국에의 경종 울리기를 통해 오히려 불사의 생명을 얻는다는 참담한 교훈. 이로써 ‘세계의 끝’과 ‘유토피아’는 서로 으르렁거리지 않고 오히려 다정하게 한 몸이 된다. 원래 토머스 모어 경이 상상했던 섬, ‘유토피아’는 인클로저 운동 등으로 근세 자본주의의 패권적 기틀을 마련해가던 영국의 저 너머, 즉 ‘세계의 끝’에 위치해 있었다. 그럼 자본의 유토피아가 세계의 종말과 결합하는 데 맞서 결자해지의 상상력을 어떻게 발휘할 수 있을까. 그러나 국내외적으로 상황은 좋지 않다. 2011년은 후쿠시마 원전사태 등 자본과 국가가 공동기획한 문명화 프로젝트가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낳게 한 사태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다른 한쪽에서 이러한 자본과 국가에 맞서 ‘점령하라!’(Occupy!)라는 구호와 중동의 정치적 혁명이 모종의 연대마저 기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올해 들어서는 한둘의 예외를 제외하곤 소강상태인 듯하다. 국내도 사정은 다르지 않아 2012년 4.11 총선 참패 이후 국민적 유행어가 된 ‘멘붕’이 환기하듯이 자본과 국가의 공세는 가속화되고 있으며, 통합진보당 부정선거 사태에서 보이듯이 진보세력조차 원하지 않는 정치적 덫에 걸렸다. ‘분노의 자본’을 동원해 맞서기엔 많은 이들이 지쳤고, 지금까지 어떻게든 간신히 견뎌왔으니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이 정권이라도 빨리 눈앞에서 꺼져버리길 바라는 것 같다. 이런 먹먹한 때 유토피아는 ‘좋은 곳’이 아니라 점점 ‘어디에도 없는 장소’라는 의미에 더 충실해지는 것처럼 보인다.

신자유주의로 통칭되는 자본의 유토피아는 그 자신과 몇몇 추종자를 제외한 모든 것들을 디스토피아적 파국으로 만들어 버리며, 그에 대항하려는 디스토피아적 상상력마저 자본의 유토피아에 포획될 처지다. 그러니 회색빛의 우중충한 이름만큼이나 좌겳離컥� 계몽주의적겴?鄂퓸팀� 기획이 엄청난 파국을 가져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음울하게 이야기하는 존 그레이와 같은 사상가가 우리에게 다량으로 투여하는, 약간의 현실주의적 각성을 수반하는 강력한 허무주의의 마약이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을 도리가 없다. 국내에도 번역된 그의 책들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 <추악한 동맹>에서 엿보이듯이 그레이는 지난날의 공산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해 승리했다고 우쭐해하는 자본주의 모두는 근대의 계몽주의의 기반이 된 유토피아적 신념이 낳은 파국의 정치경제적 시스템에 다름 아니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이 시스템의 창공에 파국과 구원을 함께 열망하는 천년왕국의 기독교가 불가해한 섭리로 군림하고 있으며,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그리고 그것들을 수반하는 국가시스템 모두 세속화된 정치종교의 통치술에 불과하다. 종교적 미신이나 광신을 타파했다고 자부했던 계몽주의가 바로 새로운 시대의 미신과 광신을 자처했던 것이다. 제 아무리 으르렁거리며 서로 다투더라도 서구 근대의 정치적 좌우파가 앞 다투어 약속했던 계몽, 과학, 진보의 유토피아는 현재의 고통과 희생을 감내하면 미래에 약속한 구원이 도래하리라는 그릇된 신념의 공통의 산물에 불과하다. 그 잘못된 신념이 낳은 최악의 물질적 결과는 나치즘과 스탈린주의의 만행으로 20세기의 역사를 피로 물들였다. 그러나 공산주의가 물러난 21세기에도 가령 미제국은 자신의 승리에 도취해 자유민주주의라는 첨병을 동원한 자본주의, 자본의 척후병을 둔 자유민주주의적 실험, 곧 실제로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엄청난 유혈과 파괴를 동반할 뿐인 가망 없는 천년왕국의 실험을 도무지 멈추려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도대체 뭘 하려고 들지 말라. 인간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시대가 와야 한다. 이것은 허무주의인가 신종 메시아주의인가. 어떠한 신념도 갖지 말고 그저 동물들을 쓰다듬으며 세상을 관조할 것을 권유하는 부활한 쇼펜하우어, 우리시대의 현자가 들려주는 현실주의적 충고는 이 엄청난 불의의 현실을 둘러봐도 속수무책으로 야속해 보인다. 자본주의의 승리가 곧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라도 되는 양 떠들어대는 현재의 유일무이한 정치겵쓩냅� 실세를 비판할 때는 참으로 통렬하다가도 역사의 무덤에 안치된 공산주의의 실험을 모조리 꺼내어 부관참시할 때는 이 현자가 지그시 눈을 감고 천천히 시취를 향유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품게 한다. 그레이 편에서, 역사적 유물론이 후퇴되고 있는 마당에 역사적 유물론을 ‘코스프레’하는 오늘날의 신학적 메시아주의는 실제로는 지구를 강타할 핼리혜성을 대망하는 것보다 못나 보이리라. 신학 또한 인간의 발명품이기에. 발터 벤야민이 독소불가침조약에 절망하면서 마지막으로 기다린 것은 메시아가 아닌 핼리였을지도 모른다.

유토피아=디스토피아라는 전제 아래 역사를 도매금으로 처리하는 그레이의 주장을 십분 받아들이더라도 우리에게는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지 않다. 초점을 이동해 그레이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아니라, 형식, 즉 그의 수사학과 서사학이 유래 없는 별종이 아니라는 점을 우선 지적할 필요가 있겠다. 그레이만큼 현실주의자이지만 허무주의자는 아닌 경제학자 앨버트 O. 허시만의 논리를 응용하면 그레이의 수사학은 보수주의 수사학의 원조인 ‘역효과 명제’의 최신 판본에 불과하다. 즉 ‘어떠한 계획된 행동도 비참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라는. 또 그의 서사학은 엔트로피적이다. 즉 ‘존재하는 것은 반드시 소멸을 향해 갈 수밖에 없다’는. 이것은 어떤 의도가 남김 없는 결과를 초래하리라 믿는 순진하고도 극단적인 주장은 아닌가. 그에 맞서 우리가 상상하려는 것은 계획됐지만 아직은 실현되지 않은 의도이다.

장-자크 아노가 스탈린그라드전투를 배경으로 만든 반공주의 오락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2001) 후반부에는 감독 자신도 의도하지 않았던 인상적인 장면이 나온다. 연적이자 동지인 소련군 저격수 자이체프(주드 로)의 승리를 위해 공산당원 다닐로프(조셉 파인즈)는 자신의 머리를 독일군 저격수 코니그(에디 해리스)에게 내민다. 공산주의가 우리에게 평등하게 욕망하는 세상을 가져오리라는 약속은 거짓말이었다고 말하며, 다닐로프의 희생 덕택에 코니그를 사살한 자이체프는 자신의 저격용 소총을 다닐로프의 팔에 끼워놓는다. 다닐로프를 영웅으로 만들려는 자이체프의 배려였다. 공산주의가, 유토피아가 파국으로 끝났다고? 파국 속에서 보여준 다닐로프의 희생과 자이체프의 배려, 이들의 우정이, 파국 속에서 막 실현될 기미를 보인 공산주의적 동지애의 가능성이 공산주의가 아니라면 그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렇게 파국, 세계의 끝에서 가능성의 장소, 유토피아를 상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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