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병인 / 국민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유럽통합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실험이 전례 없는 위기에 직면해 있다. 구제 금융을 둘러싼 그리스의 정치적 혼란과 그에 따른 유로존의 긴장과 갈등은 지금까지 유럽통합이 이룩한 가장 위대한 성과가 물거품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는 우려를 증폭시키고 있다. 불안감과 기대감이 교차하면서 쏟아지는 유로존 해체 시나리오는 이러한 상황의 단면이다.

유럽연합이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고 그 역사적 실험을 완수할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이는 유로존 붕괴라는 종말론적인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 아니다. 당면한 유로존의 위기는 어떤 형태로든 ‘봉합’의 수순을 밟게 될 것이다. 유로존에 결부된 복잡한 국제적, 정치경제적 이해관계는 봉합의 수순을 필연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다. 유럽통합의 미래가 불투명한 것은 당면한 유로존의 위기 때문이 아니라 현재의 위기를 통해 오히려 보다 분명해진 근본적인 문제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문제가 그것이다.

1990년대 이후 유럽통합의 비약적 발전은 ‘민주주의 결핍’을 둘러싼 논란을 수반해 왔다. 유럽통합이 서구 선진민주주의 국가들에 의해 주도됐다는 점에서 유럽통합이 민주주의의 결핍을 낳는다는 주장은 다소 역설적이다. 그러나 단일시장과 단일통화를 통한 경제공동체의 수립으로 국민국가 중심의 기존 정치질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반면, 유럽 차원의 새로운 정치질서는 아직 구비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러한 논란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사회적 유럽’의 문제와 구조적 한계


‘민주주의 결핍’에 대한 논란은 대의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 또는 복지민주주의의 문제를 둘러싸고 전개돼 왔다. 전자가 민주주의 제도와 절차에 관한 것이라면 후자의 문제는 민주주의의 내용을 둘러싼 논란이다. 대의민주주의 문제를 둘러싼 논란은 유럽연합이 대의민주주의 원리를 구현하고 있지 못할 뿐만 아니라 회원국 수준의 대의민주주의 질서마저 왜곡하고 있다는 비판에 기초해 있다.

단일시장과 단일통화의 출범은 주요 경제정책의 결정 과정에서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와 유럽중앙은행 등의 초국가적 기구가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이렇게 결정된 유럽연합의 정책은 회원국의 법률에 우선하는 효력을 갖는다. 문제는 이들 초국가적 기구들이 대의민주주의 질서로부터 독립적인 관료적 전문가 집단이라는 속성을 갖는다는 점과 이들에 대한 대의민주주의적 감시와 통제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유럽연합이 대의민주주의 원리와 괴리돼 있다는 비판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마스트리히트 조약 이후 2009년 12월 발효된 리스본 조약에 이르기까지 유럽연합의 제도적 진화는 대의민주주의 문제에 대한 대응의 결과였다. 그 핵심은 유럽의회를 명실상부한 입법기관으로 정립하고 유럽연합의 주요 기구에 대한 감시 기능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리스본 조약에서 ‘보통 입법 절차’라는 명칭으로 일반화된 유럽의회의 정책 결정 과정은 유럽의회의 동의 없이는 어떠한 정책도 결정될 수 없도록 했다. 나아가 유럽연합의 모든 기구, 특히 집행위원회가 유럽연합의 정책에 관한 모든 정보를 회원국 의회에 제공하도록 의무화하면서 회원국의 대의민주주의 질서를 왜곡하는 효과를 최소화하는 노력도 병행하고 있다.

이로써 대의민주주의 왜곡 문제에 대응할 수 있는 제도적 기초는 어느 정도 마련됐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적 진화가 ‘민주주의 결핍’을 둘러싼 두 번째 논점, 즉 민주주의의 내용에 대한 논란을 해소하지는 못한다. 민주주의의 내용을 둘러싼 논란은 이른바 ‘사회적 유럽’의 문제로 나타난다. 적어도 2차 대전 이후 유럽의 민주주의는 사회민주주의 또는 복지민주주의의 내용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복지국가를 통해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시장 경제의 전횡을 통제하고자 했던 것이 그 단적인 예이다. 유럽통합이 이러한 가치를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 ‘사회적 유럽’의 문제의식이라면, 현재의 유럽통합이 오히려 이에 역행하고 있다는 것이 ‘민주주의 결핍’론의 또 다른 주요 논점이다.

단일시장과 단일통화의 수립 이후 유럽 국가들의 복지 능력은 구조적으로 제약돼 왔다. 기존의 복지국가 체제가 자본과 시장에 대한 통제를 전제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자본의 완전한 자유와 단일한 유럽시장경제의 확립을 최우선적 가치로 두는 유럽통합과 양립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럽 국가들이 발전시켜 온 민주주의의 가치와 내용을 구현하는 유일한 방법은 유럽연합 차원에서 기존의 복지국가체제를 대체할 수 있는 복지민주주의를 구현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회적 유럽’의 문제의식이 제기되는 이유이다.

그러나 현재의 유럽연합은 ‘사회적 유럽’의 가치를 실현하기에 구조적인 한계를 안고 있다. 유럽연합 차원에서 복지정책을 실현할 수 있는 재정 능력이 결여돼 있을 뿐만 아니라 이른바 ‘규제 국가’라는 속성으로 인해 자본과 시장에 대한 통제를 구현할 의지와 능력도 없다. ‘사회적 유럽’의 문제의식에 기초한 ‘민주주의 결핍’론에 대해 유럽연합이 사회민주주의적 가치를 투영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반론이 제기돼 왔던 것은 이러한 사정을 반영한다. 유럽연합의 제도적 특성으로 인해 유럽연합의 민주주의 문제가 사회민주주의와는 다른 각도에서 조명돼야 한다는 논리는 ‘사회적 유럽’의 문제의식을 대의민주주의 문제로 치환하면서 유럽연합의 제도적 진화를 이끌어 왔다.

현재 유럽의 위기는 이러한 치환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유럽통합의 성격과 내용을 재고해야 한다는 요구가 분출되고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근본적이다. 구제 금융 문제를 둘러싸고 그리스에서 전개되고 있는 정치적 혼란은 복지 후퇴를 강요하는 유럽연합에 대한 유럽시민의 저항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만성화된 실업 문제와 복지 축소는 비단 그리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서, 그리고 유럽연합이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점에서 현재 그리스에서 나타나는 정치적 혼란은 유럽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를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유럽통합의 기초로서 ‘공론장’의 기획


유럽이 경제공동체를 넘어 정치공동체로 나아가는 위대한 실험을 완수할 수 있을지는 당면한 위기의 핵심적인 쟁점인 ‘사회적 유럽’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사회적 유럽’의 문제는 단지 복지정책의 문제인 것이 아니라 향후 수립될 정치공동체의 기본 이념과 성격을 규정하는 정치적인 문제이다. ‘사회적 유럽’의 문제가 정치공동체로의 발전에 관건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문제는 다시금 민주주의에서 그 해법을 찾을 수밖에 없다. 하버마스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사회적 유럽’의 가치를 토론하고 공유하는 유럽시민들의 ‘공론장’을 유럽통합의 기초로 삼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만 비로소 해법이 마련될 수 있는 것이다. 이 과정은 장기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 결과와 성패를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회적 유럽’에 대한 요구가 분출하고 있는 만큼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파시즘과 유사한 형태의 과격한 정치적 담론이 확산되고 있는 것 또한 유럽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사회적 유럽’의 문제에 대한 유럽시민의 ‘공론장’이 더욱 절실해지는 것이다. 

유럽통합은 초기 단계부터 다양한 정치적 기획이 혼재돼 있는 역사적 실험이라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 경제적 합리성과 효율성을 최우선적 가치로 두는 것이 지금까지의 유럽통합이었다면, ‘사회적 유럽’의 문제는 이를 대체할 새로운 정치적 기획에 대한 요구라 할 수 있다. 현재 유럽의 위기가 총체적인 것은 이러한 기획을 마련해야 하는 중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어떻게 귀결될지 알 수는 없지만, ‘민주주의 결핍’을 둘러싼 논란 속에서 유럽연합이 새로운 정치적 기획을 위한 제도적 기초를 마련했다는 점은 긍정적인 요인이라 평가할 수 있다. ‘사회적 유럽’의 문제를 치환하는 역할을 했던 대의민주주의 원리의 확충이 오히려 그 실현을 위한 기초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향후 유럽통합의 진화가 역동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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