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양식 / 한신대 연구교수

 
 

인류는 여러 징후들 속에서 종말을 예감하고 행동해 왔다. 자연 재해나 이상 기후 또는 전염병 창궐이나 전쟁 소식 등은 인류에게 종말의식을 갖게 했다. 백년 혹은 천년이라는 일정한 시간 단위로 끊어지는 시점에서, 또는 특정한 시간 계산 속에서 선포되는 종말일의 예언도 사람들에게 세상의 종말을 예감하게 했다. 이러한 종말의식은 ‘천년왕국운동’이라는 특정한 역사 행동으로 표출돼 왔다.

이런 역사 현상에서 주목할 것은 세상 종말을 믿든 안 믿든 상관없이 종말사상과 운동이 역사를 형성하는 힘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 인정한다면 오늘날의 역사 현실에 대처해 나갈 새로운 역사의 길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은 지나간 과거를 관리하며 새로운 시대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역사적 책임을 느끼는 인간만이 취해 온 자세였다. 세상의 종말이 온다는 사실에 대해서 사람들은 상반된 감정을 동시에 경험한다. 세상이 끝난다는 데서 비롯한 불안과 두려움이 팽배해지는 한편, 새로이 열리는 세계에 대한 기대와 희망도 일어난다. 종말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동시에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에 등장해 왔고 앞으로도 계속 생길 것이다.

종말을 예고하는 것

현 시점에서 막연하게나마 한 시대의 종말과 함께 또 다른 시대의 도래를 몸으로 느끼는 징후들이 적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종말을 봐야 할 것인가? 지구 또는 우주의 종말은 과학적인 것 같으면서도 미신적 요소가 크다. 역사의 종말과 이데올로기의 종말, 노동의 종말 등은 다분히 관념적이다. 육식의 종말, 소유의 종말, 자원의 종말, 생물의 멸종 등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여전히 체감하기 어렵다. 종말론은 종교성을 띠지 않는다면 사회 행동으로 표면화되기가 그리 쉽지 않다. 근래에 와서 환경파괴와 자원고갈에 관련한 사고들로 인해 환경론자들의 꾸준한 호소는 사회적 관심을 끄는 데 어느 정도 성과를 보이고 있으나 실제 현안들에 대한 종말론적 위기감이 아직도 충분히 확산된 것 같지는 않다.

이런 와중에 종말을 예고하며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현실 문제들 가운데 최고의 쟁점은 단연 자원의 문제다. 지구의 자원은 한정돼 있는데 기존의 대국과 더불어 중국, 브라질, 인도 같은 나라들이 산업국가로 떠오르면서 세계의 자원 문제는 문명의 붕괴, 더 나아가 인류의 파멸을 가져올 절박한 문제로 부상했다.
예컨대 석탄, 석유, 가스와 같은 화석에너지 자원은 산업사회의 동력으로 근·현대 세계체제를 붙드는 근간이었다. 공장을 가동하고 삶을 유지하게 하며 세계를 연결시키는 경제체제도 형성시켰다. 그러나 그것은 환경오염을 유발해 기후 변화를 초래하고 국가 간 경쟁을 부추겨 전쟁을 자초하는 결과들로 나타났다. 또한 석유에서 뽑아낸 물건들이 세계로 연결망을 가지고 소비되는 체제 속에서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다는 보고들이 쌓이고 있다. 지구 자체가 닫힌계로서 자원의 한정된 양이 열린계를 지향하는 생물들(인간을 포함해)을 부양할 수 있는 능력의 한계를 넘어섰다는 통계수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종말을 강력히 예고하고 있다.

‘월가를 점령하라!’란 구호를 내걸고 일어나 세계로 확산되는 1%를 향한 99%의 각성은 자본주의 체제의 종말에 대한 작지만 강력한 증거로 보인다. 프랑스의 대선 결과와 그리스의 총선 결과로 말미암아 유로존의 공조에 균열이 생긴 것도 그 연장선에 있다고 하겠다. 환경과 실업 문제의 해결책으로 지역단위 경제의 활성화를 내세우는 주장들도 같은 맥락의 이야기다. 국가 권력층들이 지향하고 강대국 위주로 움직이는 신자유주의적 경제 체제의 붕괴는 기정사실로 굳어지는 듯하다. 자본주의와 산업주의의 종말은 과정만 남아 있을 뿐 사체나 마찬가지다.

종말이 예고하는 것

종말을 예고하는 현상에 직면하면 사람들은 그 종말을 막으려는 대안적 노력을 찾아 나서기 마련이다. 뭔가 확실한 대안을 찾지 못한다면 인류는 종말을 맞게 될지 모른다. 석유라는 자원 하나만 놓고도 그것이 경제 체제의 문제뿐 아니라 기후변화에 이은 자연재해와 기근 문제, 질병 문제, 전기시설망의 붕괴 문제, 생활용품의 부족 문제, 국제 정치 판도 문제 등 셀 수 없을 정도로 인류의 삶 전체에 연결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구의 부양 능력이 급격히 약화된 상황에서 적절한 대안을 찾지 못하고 이대로 가다가는 머지않은 미래에 지구상에서 인류의 종말이 일어나는 것은 막을 수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미래에 관한 낙관적인 이야기는 끊이지 않는다.

천안문 세대인 리민치는 중국의 부상으로 인해 자본주의 세계경제가 문제에 직면하자 자유주의에서 사회주의 지지자로 돌아섰다. 그는 자본주의 체제하 노동 생산성의 부단한 발전이 지속불가능한 자원의 남용으로 이어져 위기를 초래했음을 분석하고, 미래 사회주의에 기대를 건다. 미래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에서 축적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식을 잘 활용해서 확대해 나가고, 세계 인구수를 적정 수준 이하로 줄어들게 한다면 인류와 자원 관계가 유리하게 재확립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제레미 리프킨은 ‘3차 산업혁명’이 올 것이라며 화석 연료의 대체가 시대의 대안이 되리라고 주장한다. 화석 연료를 기반으로 발전해 온 2차 산업혁명 시대가 낳은 부정의한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마스터플랜으로 인터넷 기술과 재생에너지의 결합을 통한 기존 체제의 전환을 제시했다. 소유 중심의 수직권력 구조가 물러나고 공유 중심의 수평권력 구조로 재편되면서 그 돌파구가 서서히 드러날 것이라고 한다.

관점의 차이는 있지만, 둘은 낙관론을 제시한다. 해결 모색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낙관론에 기대를 걸고 적극적으로 문제 해결에 나서는 것은 위기의 시대를 돌파해 갈 인간 특유의 동력이다. 문제는 잘못된 낙관론이 더 깊은 수렁에 빠지게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마냥 낙관론에만 기댈 수는 없다. 리처드 하인버그의 말대로 아직 어두운 종말의 적나라한 사실보다는 행복한 미래의 환상을 붙들려는 경향이 광신적인 종말신앙을 어느 정도 막아주고는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언제 터질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자연재해나 그 밖에 특이 상황이 발생하며 종말의 징후들이 더해지면 대중의 불안과 두려움은 커질 것이다. 여기에 예언자들이 나와 종말을 예고하고 기존 질서를 대체할 천년왕국의 도래가 전파되면 대중의 천년왕국주의적 사회 행동이 촉발될 수 있다. 그것은 사회 불안을 가중시키는 폭동의 형태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사회 불안과 위기는 동시에 새 시대를 향한 희망의 발판이기도 하다. 이것이 묵시사상을 사회적 잠재력으로 보는 이유다.

천년왕국운동의 역사에 비추어 볼 때 종말 의식은 종말로 끝나지 않는다. 종말 너머의 신세계를 보게 만드는 것이다. 근대적 이데올로기의 부재 상황에서도 종말 사상은 공유재적 평등사회라는 혁명적인 새 질서의 도입을 가져왔다. 이 점에서 우리 인간은 종말의 상황에 직면해서도 종말 너머에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꿈을 결코 버리지 않을 것이다. 종말이란 파국적 상황에서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신의 개입을 통한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내다보는 것이다.

이러한 종말론적 내지 묵시론적 사고와 행동은 광신적 발광이 아니라 창조적 몸부림으로 역사의 지평을 새롭게 여는 힘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따라서 종말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으로 넘어가기 위한 문지방과도 같은 리미널리티(경계선, liminality)로 보고 두려움보다는 희망으로 대해야 할 역사 인식 단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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