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종국 / 경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기독교의 정치 참여는 두 가지 모델로 나눠볼 수 있다. 첫째는 영미식 모델로 기독교 정당을 따로 만들지 않고 세속적 정당에의 참여를 통해 기독교적 가치를 구현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둘째는 대륙식 모델로 기독교의 명칭을 가진 정당을 결성해 기독교적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한다. 주로 인구의 다수가 로마 가톨릭인 국가에서 종종 나타난다. 이 대륙식 모델은 다시 독일식과 남미식으로 나뉜다. 전자는 사회통합의 기능을 강조하며 때론 진보적인 정책도 수용하고 있다. 후자는 대개 군사독재와 연계돼 있고 특정한 사회 계층의 대변자 역할을 하는 경향이 강하다. 위키피디아의 통계에 따르면 현재 67개국에 176개의 기독교 정당들이 있고, 이들 중 극우파가 12개, 우파가 107개, 좌파가 8개, 따로 분류되지 않는 정당들이 49개라고 한다.
 

기독교 정당 등장의 세 가지 요인
 

  한국에서 기독교 정당의 역사는 꽤 오래됐다. 강인철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1945년 해방을 맞이하자 당시 가장 조직화된 세력이었던 기독교계에서 활발한 정당운동이 일어났다. 남한 지역에서 조선기독교남부대회, 기독신민회, 독립촉성기독교중앙협의회, 그리스도교도연맹, 기독교민주동맹, 기독교사회주의연맹 등이 결성됐고 북한 지역에서 북조선기독교연맹, 기독교사회민주당, 기독교자유당 등이 나타났다. 그러나 분단과 전쟁의 와중에 이 기독교 정당들은 순식간에 세속정당에 흡수되거나 사라졌다. 북한의 기독교 정당들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일소됐고, 남한에서 명맥을 유지해온 기독교 명칭의 정당들도 군사독재의 강력한 탄압으로 정당의 기능을 상실했다.

2011년 9월 기독자유민주당의 창당대회 모습. 출처:국민일보
2011년 9월 기독자유민주당의 창당대회 모습. 출처:국민일보

  한국의 정치 지형에서 거의 소멸됐던 기독교 정당이 다시 등장한 것은 2004년의 제17대 총선이었다. 이 시기에 나타난 한국 기독교의 정치 참여는 모두 세 가지 형태였다. 첫째는 선거 과정의 공정성을 유지하려는 공명선거운동이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과 ‘공의정치실천연대’ 등은 140여개 시민단체들과 함께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공선협)’를 결성해 공명선거운동과 선거참여 캠페인에 주력했다. 둘째는 낙천낙선운동과 같은 보다 적극적인 시민적 참여운동이었다. ‘기독교총선연대’에는 예장통합과 성공회 등 5개 교단을 비롯해 33개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해 낙천‧낙선 운동을 적극 알리는 데 주력했다. 셋째가 바로 소수의 기독교 명망가들이 주도한 ‘한국기독당(기독당)’의 출현이었다. 김준곤, 조용기 등이 시작했고 김홍도, 전광훈 등이 계승하고 있다.

  기독교의 명칭을 차용한 정당이 등장하게 된 요인으로 다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정치 체제의 민주화와 1인2표제의 채택이다. 과거 박정희와 전두환의 군사독재 시절에 한국 교회의 대다수는 국가에 순응했고 한국기독교협의회(NCC) 중 일부만이 민주주의와 인권의 수호자로서 헌신했다. 이후 수많은 민주투사의 희생으로 민주정부가 들어서자 기독교정당 설립의 여지도 열렸다. 더구나 1인2표제의 채택으로 군소정당들도 원내 진출이 가능하다는 희망을 갖게 했다.

  둘째는 자신들이 장악하고 있는 권력자원에 대한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군사독재하에서 국가와 호의적인 동반자 관계를 유지했던 대형교회 목사들은 이제 수십만의 신도들과 수백억 원의 자금을 동원할 능력을 갖추게 됐다. 이들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은 한국의 전통적 권위주의와 결합해 위세를 떨쳤고, 이들이 지배하는 교회나 조직의 추종자들은 매우 굴종적인 태도를 보였다. 더구나 여러 차례 시도했던 시청 앞 집회는 이들이 자신의 권력자원과 그 효율성에 대해 지각하게 된 계기였다.

  셋째는 진보 세력의 등장에 대한 공포라고 할 수 있다. 한국전쟁 이래 반공주의적 정서에 깊이 함몰돼 있던 이들은 민주 정권을 맞이해 극우적 세력이 조성한 반공 히스테리에 극단적으로 휩쓸리고 있었다. 이들은 남한에 친북 세력이 70% 이상이며, 좌경세력이 계속 집권할 것이고, 결국 한국 교회가 위기에 처할 것이라는 극우적 선전을 굳게 믿고 있었다. 이 반공 히스테리가 근본주의적 정교 분리론을 신봉하던 그들이 갑자기 윌버포스와 로잔언약을 언급하는 정치 참여론으로 급선회하게 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이다.


기독교 정당의 실패


  한국 기독교인들의 생각이 그들의 기대와 다르다는 점은 지금까지 나타난 기독교 정당의 실패를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 17대 총선에서 한국기독당은 유효투표수의 1.1%를, 18대 총선에서 기독사랑실천당은 2.6%를 얻었고, 19대 총선에서 기독당(기독자유민주당)이 1.2%, 한국기독당이 0.25%를 얻었을 뿐이다. 한 사람의 지역구 당선자도 없었고 정당별 비례대표조차 당선시키지 못했다. 정당법이 규정하는 유효투표수의 2%를 채우지 못해 정당해산을 당하는 수모도 겪게 됐다.

  기독교 정당의 실패 원인으로 다음과 같은 요인들을 들 수 있다. 첫째, 대통령중심제의 양당 경쟁 구조에서 군소정당들은 기본적으로 사표심리에 시달리게 된다. 기독교 정당에 투표할 수 있는 잠재적 유권자들은 주로 보수층이다. 이들이 비록 기독교 정당에 대해 애착을 두거나 담임목사의 카리스마적 설득에 마음이 움직이더라도 실제 투표는 집권 가능성이 있는 세속적 거대 정당에 던지기 마련이다. 만일 기독교 정당의 집권이 예측 가능하다면 이러한 불일치가 일어날 수 없겠지만, 인구의 25% 정도만이 기독교도들인 한국에서 이러한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둘째, 기독당 인사들의 과도한 극우적 이데올로기가 한국 기독교인들 다수에게 반감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이다. 아무리 다수 기독교인이 극단적 반공주의와 근본주의적 정교 분리론에 젖어 있다 할지라도 상식 수준에서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기독당의 주장에 대해서는 염증을 느낄 수밖에 없다. 기독당이 정당이념으로 내건 종북좌파 척결, 좌파정권의 반언론‧반기업 척결, 수쿠크법(이슬람 채권법)과 동성연애법 반대는 그 대상 자체가 지극히 모호하다. “세금을 많이 낸 자에게 영광을 부여하여 경제개혁을 도모한다”는 정책에는 실소를 금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기독당을 주도하는 일부 인사들의 심각한 정신장애적 언행이 언론에 자주 보도되면서 과거 기독당을 주도했던 보수적 목사들조차도 점차 기독당 참여를 꺼리게 됐다.

  셋째, 기독당의 정책들이 교회의 집단이기주의를 표방하고 있다는 점이다. 유럽에서 기독교 정당들은 하나님의 성품인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구현하는 정책들로 세속적 정당들과 차별화된 경쟁을 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기독당은 교회의 집단이기주의를 추구하는 편파적이고 불공정한 정책을 내걸었다. 그들의 12대 공약에서 “교회가 납부하는 은행이자를 2% 이하로 낮추어 교회 채무를 100% 해결한다”라든지 “국가가 실시하는 각종 자격시험을 주일날 실시하지 못하도록 법을 제정한다” 등의 정책은 기독교인들조차도 기독당을 냉소적으로 대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한국과 같은 다종교 사회에서 기독교의 공공연한 집단이기주의는 국가통합에 심대한 위협이 된다.

  현재 한국의 정치는 기독교인들이 장악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사저널에 따르면, 2012년 현재 대통령은 두말한 나위가 없고 전‧현직 장관 56명 중 32명(58%), 18대 국회의원 296명 중 194명(66%)이 기독교인이었다고 한다. 정치지도자의 종교별 분포로 볼 때 만일 이 기독교인들이 진실로 기독교적 정치를 원한다면 그렇게 실현할 수도 있다. 반드시 기독당이 정권을 잡아야만 그러한 정치를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미국은 세속적 정당들이 번갈아 집권하고 있지만 누가 집권하든지 매우 기독교적인 레토릭을 사용하면서 기독교적 가치의 추구를 공공연히 주장하고 있다. 이는 교회의 집단이기주의가 아니라 인류 보편의 가치, 즉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정책의 정신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판단하건대 한국에서 기독교 정당은 가능할 수 있으나 결코 바람직하지는 않다.

저작권자 © 대학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