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은정 / 문학평론가

 
 

이제 여기는 상품의 세계가 돼버린 지 오래다. 화려한 광고의 축복 속에서 매일같이 탄생하는 새 상품들은 이전의 상품과의 사소한 차이를 부각시킴으로써 전혀 낯설고 새로운 것으로 포장된다. 사실상 그 사소한 차이는 다른 상품과의 비교를 통해서만 형성되는 교환가치로 결코 직접 사용될 수 없는 환각적 허상이지만, 그 허상은 자신이 허상임을 감추고 완전한 실체처럼 인식되도록 제작된 환각이다. 상품 광고가 만들어내는 이미지와 분위기의 시제는 언제나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 미래의 것, 구입하여 소유함으로써 도래할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상품은 엄연히 물질이라는 구체적 속성을 다루는 노동 시간의 산물임은 물론이다.

어떤 시들은 상품의 세계가 은폐하는 이 구체적 시간 속으로 직접 들어가 상품화 과정을 거치며 의도적으로 감춰져야만 했던 노동자들을 시의 중앙으로 불러낸다. 송경동의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이 바로 그런 시집으로, 우리는 이 시집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상품의 화려한 이미지의 이면에는 “H빔에 찍혀 발가락을 잃거나 아득하게 낙하하거나 / 그라인더 날에 눈 베여 떠나가던 동료들”(‘그해 가을 돗곳’)이, “빨아도 빨아도 지워지지 않는 얼룩”을 묻힌 채 “기름때 전 공장노동자”들이(‘석유’) 있다는 것을. 당연하게도 이 시집은 그들을 시집 내부로 불러들임으로써 그들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어쩌면 오히려 더욱 강조돼야 하는 것은 노동을 대하는 시적 태도다.

이 시집의 시적 주체는 노동자와 시인이라는 이중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노동자로서의 삶을 앞지르는 때에는 언제나 죄책감이라는 감정이  출현하는 것과는 달리, 노동자로서 정체성이 앞선 시는 언제나 어떤 자부심과 함께 출현한다는 것이다.

전자는 ‘첫 고료’ 같은 시편이 대표적이거니와, 산재추방의 날에 읽을 시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모니터 앞에 멍하니 앉아 “또 뭐라고 써야하지 / 무슨 말을 할 수 있지” 막막해하며 시작하는 ‘나의 모든 시는 산재시다’ 역시 이에 속한다. 후자의 경우 대표적인 시편은 ‘목수일 하면서는 즐거웠다’이다. 노동이라는 것은 “2인치 대못머리는 두 번에 박아야 하고 / 3인치 대못머리는 네 번엔 박아야 / 답이 나오는 생활”이다. 망치는 대못머리를 쾅쾅 울리며 묻는다. “손으로 일하지 않는 네가 / 머릿속에 쌓고 있는 세상은 / 얼마나 허술한 것이냐고 / 한뜸 한뜸 손으로 쌓아가지 않은 / 어떤 높은 물질이 있느냐고”. 망치질은 그에 대한 정직한 실천이기에 화자는 “목수일 하면서는 즐거웠다”고 말할 수 있다.

노동에 대한 자부심에서 기인하는 이러한 즐거움은 노동의 가치를 물질적 보상의 금액에서 찾지 않는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화폐의 액수가 가치의 표현을 대신한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이러한 태도는 그 자체로 사회적 가치의 구조화를 이탈하는 측면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극대화될 때 시선의 역전은 전면적인 것이 된다. 다음과 같은 구절이 그렇다. “보라, 저 거리에 나온 모든 상품들도 / 불구의 몸으로 산재를 앓고 있다”(‘나의 모든 시는 산재시다’). 이 구절이 놀라운 것은 노동자들을 억압하는 존재로 기능하는 상품을 저항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상품이야말로 노동이라는 구체성이 결여된 산재를 앓는 불구의 몸이라고 인지한다는 것에 있다. 노동에 대한 자부심은 오히려 사회적 가치의 구조화 방식을 완전히 역전시켜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 지적했듯 송경동의 시에서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언제나 부끄러움과 함께 등장하지만, 우리는 바로 이런 대목에서 시인으로서의 통찰력을 엿본다. 오로지 자본으로만 점철된 사회에서 시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그에 대한 대답은 다양하게 제출될 수 있겠으나 어떤 대답이든 자본이 보지 못하는 맹점의 눈을 부릅뜨고 있어야 한다는 점만은 공통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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