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광 / 경희대 영미문화전공 교수

파국에 대한 상상이 오늘날처럼 대중화된 경우는 없을 것이다. 온갖 재난영화가 넘쳐나고, 체제의 위기와 종언에 대한 진단들이 미디어를 점령하고 있는 형국이 매일매일 펼쳐지고 있다. 도대체 이 상황은 무엇을 말해주는 걸까? 진정 파국은 오는 것일까? 아니면 안정을 희구하는 중간계급의 판타지가 과도한 공포를 자아내는 것일까?

그 원인이야 어떻든 파국에 대한 상상이 지금 여기를 살아가고 있는 많은 이들의 현재성을 드러내는 징후인 것을 말한다. 그렇기에 여기에 대한 진지한 사유를 펼쳐볼 필요가 있다. 파국은 그냥 모든 것이 끝나는 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어로 파국을 뜻하는 ‘아포칼립시스’는 감춰진 것을 드러낸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것은 끝이 아니라, 그동안 감춰졌던 모든 진리가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 진리를 가리고 있던 모든 허위가 허위로 판명나는 것이 파국의 본질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진리는 시간의 딸’(veritas, filia temporis)이다. 그러므로 파국에 대한 생각은 세상의 종말을 기다리는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강력한 유토피아 충동을 내재한 것이다. 현실에 대한 강한 부정이 여기에 내포돼 있다.
 

 
 


파국이라는 금기
파국은 끝에 대한 상상이지만, 동시에 새로운 시작에 대한 염원이다. 파국에 대한 상상이 곧 절대적 진리에 대한 갈구와 맞닿아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이런 통찰은 이미 근대가 시작되던 무렵부터 등장했다. 근대철학이 탄생했던 그 시기에 ‘적극적 파국’의 몸짓은 존재했던 것이다. 바로 데카르트가 ‘생각하는 나’를 발견하던 그 방법이 파국에 대한 상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데카르트의 상상은 주관적인 것이었다. 여기서 주관적인 것을 객관적인 것의 토대로 설정하는 일대 전환이 일어난다. 그 근거는 바로 ‘의심’이다. 의심한다는 것은 기존의 것들에 대한 비판적 거리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비판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거리화’를 뜻한다. 초월적 범주를 통해 비판할 수 없을 때, 니체의 말처럼 우리는 내재적 비판을 위해 거리를 만들어내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데카르트는 마치 건축가가 존재하는 도시를 재구성하기 위해 모든 건축물을 부숴버려야 하듯이, 의심이라는 토대 위에 기존의 관념들을 과감하게 올려놓는다. 그리하여 생각은 궁극적으로 확고부동한 토대에 대한 의심을 전제하게 된다. 말하자면, 근대 이후에야 비로소 사유는 흐르기 시작하는 것이다. 물론 데카르트는 이 사유를 고정시키고자 했다. 그래서 ‘존재’보다 ‘생각’을 앞세웠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전도는 이상한 결과를 낳는다. 생각하기에 존재하는 ‘나’이기에, 생각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역설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밝힌 철학자가 바로 하이데거이다. 그의 존재론에 이르러 생각과 존재의 관계는 비로소 제자리를 찾는다. 생각보다 선행하는 존재에 대한 발견은 파국의 존재론을 새롭게 만들어낸다. 주관적 믿음을 붕괴시키는 객관성의 범주가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파국의 문제는 데카르트처럼 파국에 대한 상상만으로 진리의 순간을 도래하게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 아니다. 파국은 존재의 차원에서 등장하는 것이다. 내가 파국을 원하든 원하지 않든 파국은 온다. 환영하든 환영하지 않든 파국은 오는 것이다. 파국을 저지하기 위한 판타지가 여지없이 작동하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마치 오이디푸스왕처럼  파국을 기다리는 이들은 자신의 운명을 알지 못한다. 파국이 도래했을 때에야 비로소 그 운명의 의미를 알게되는 것이다. 이 순간이 바로 ‘정치적인 것’이다. 정치적인 것을 억압하기 위한 온갖 방책들이 한국만큼 극적으로 체계화된 경우는 없다. 정치의 문제가 능력의 범주로 환원되는 것만 보더라도 그렇다.

‘나꼼수’의 영향이 크지만 실제로 최근 정치는 정치적인 파국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이 파국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로 전락했다. 보수든 진보든 모두 ‘이대로 가다간 망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 파국의 도래를 적극적으로 기다리는 자세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파국에 대해 상상하고, 그 파국의 진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불온하게 여기는 태도까지 보인다. 복지국가를 이루면 파국은 오지 않을 것처럼 말하는 것도 이런 태도 중 하나다. 복지가 아닌 혁명을 언급하는 것은 ‘철지난 음풍농월’로 받아들여진다. 말 그대로 ‘찌질한 자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혁명에 대한 상상은 결코 현실성의 문제와 다르다. 혁명이라는 것은 지금 현재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전면적 부정이자 동시에 재배치이다. 어떤 혁명도 물질적 조건을 뛰어넘을 수 없다.

물질적 조건이야말로 파국을 불러오는 근거이다. 자본주의의 파국은 경제에서 올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경제의 범주를 절대적 지평으로 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 파국을 막기 위해 부르주아는 정치와 경제를 분리하고자 했다. 경제를 정치의 영역에서 분리함으로써 경제적 위기는 결코 정치의 문제로 전환되지 않는다. 이는 완벽한 제어장치처럼 보인다. 경제는 곧 능력의 문제로 환원되고, 정치는 능력 없는 이들이 매달리는 ‘떼쓰기’처럼 보인다. 비판하기 앞서서 능력을 길러 자기 자신부터 현실의 조건을 넘어서는 것이 더 현명하다는 생각이 집단적인 운동을 막아선다.

파국을 저지하기 위한 다양한 기제들이 파국이라는 말 자체를 금기시하고, 부정성의 파국에 대해 토론하는 것들을 근본적으로 막는다. 파국에 등장하는 정치적인 것의 문제는 간단하게 대의정치에서 누구를 지지하고, 어떤 정당에 소속될 것인지에 대한 논의로 대체돼버린다. 심지어 한국에서 특정 정당에 대한 지지는 곧잘 ‘야권 연대’라는 유령의 호출 앞에서 맥을 추지 못한다. 특정 이념에 대한 지지를 분열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이 사실을 잘 말해준다. 동의하지 않는 이견에 대한 반감은 이로 인해서 발생하는 것이다. 토론을 막고 ‘닥치고 지지’를 외치는 태도가 바로 파국을 막고자 하는 대표적인 방어기제라고 하겠다.

지금, 여기에도 파국은 온다
파국의 문제는 자본주의의 위기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자본주의의 위기는 주관적인 의지를 넘어선 객관적 지평이다. 그러나 정당정치를 정치의 모든 것으로 인준하고 있는 이들은 이런 객관적 지평의 존재를 부정한다. 이들은 이 문제를 주관적인 의지를 통해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합리적인 해결책으로 해소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오히려 상황은 더욱 악화일로를 걷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위기는 체제 내적인 모순 때문에 발생한다. 신자유주의는 이 모순을 더 이상 견디지 못했던 자유주의의 위기 때문에 등장한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자유주의의 평등개념을 포기한 소수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신자유주의에서 평등의 고원은 더욱 높고 좁아졌다.

이로 인해서 박탈감을 느낀 이들이 99%를 위한 경제를 외치면서 거리를 점령하고 있는 것이 지금 형국이다. 이 상황이 파국을 불러올 것인가? 겉으로 보기에 그렇지 않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영원한 안정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파국의 순간이 도래하는 것은 장기적인 것이다. 단기적인 문제 해결을 통해 장기적인 파국의 도래를 지연시킬 수는 없다. 자본주의의 문제는 자신의 존재기반인 노동을 소멸시키는 체제라는 것에서 발생한다. 이런 자기 해체적인 발전의 방향에서 노동자는 소외되고 파괴된다. 노동자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다. 프레드릭 제임슨이 지적하듯이, 이런 자본주의의 모순을 분석한 마르크스의 <자본>은 실업에 대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실업자를 양산하는 체제가 바로 자본주의이다.

복지국가라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파국은 새로운 생산의 패러다임을 의미한다. 자본주의는 불평등을 토대로 현상유지를 하는 체제이다. 그렇다면 이 불평등을 명분화할 수 있는 논리가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능력론이다. 최근 선거국면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 능력론은 아직까지도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프레임이다. 심지어 정치까지 이 능력을 강화하기 위한 교양으로 소비된다. 정치의 교양화는 정치인을 연예인과 동일한 것으로 취급하는 경향을 양산한다. 파국을 상상해야 할 정치적인 것은 실종되고 예능프로그램 같은 정치가 모든 것을 장악하는 것이다. 정치가 곧 판타지가 돼버렸다. 과연 이 판타지는 지속될 것인가? 당연히 지속은 불가능하다. 이 지속이 깨어지는 순간이 바로 파국일 것이다. 자본주의라는 공공연한 비밀이 그 실체를 드러내는 순간 말이다.
 

저작권자 © 대학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