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학교 대학원신문
인터뷰, 임근준
최종편집 : 2020.10.9 금 13:00
기획사회
선교 혹은 종교와 정치의 이종교배이창익 / 원광대 마음인문학연구소 HK연구교수
박정민 기자  |  narannyoz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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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8호]
승인 2012.04.03  00:5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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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 선교는 종교를 전달하기 위한 가장 직접적인 수단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기독교 신자들에게 선교는 예수와 바울 같은 성서적 인물의 활동을 체험하는 모방극이기도 하다. 게다가 대부분의 신자들은 선교를 통해서 ‘종교와 세속의 경계선’을 선명히 재확인하게 된다. 선교는 종교를 확산하기 위한 장치일 뿐만 아니라, 종교와 세속의 벽을 확인하는 ‘종교적 단절’의 경험이기도 한 것이다.

  또한 선교는 필연적으로 진리와 거짓을 구분하는 경험이다. 선교의 과정 속에서 해당 신자는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세상을 프로그래밍하는 법을 배워나가게 된다. 그러므로 선교는 강인한 신자를 만들기 위한 일종의 하드 트레이닝인 것이다. 대개 종교는 필연적으로 세상의 모든 사물과 사건을 종교적인 것으로 변형시키려는 열정에 의해서 움직인다. 특히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개종의 종교’이기 때문에 세계 모든 공간의 빈틈없는 기독교화는 기독교인의 필수적인 사명인 것처럼 여겨진다. 즉 선교는 기독교라는 종교 자체와 분리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기독교 자체의 종교적 숙명이며 지향점 같은 것이다. 

선교를 위한 장치들

  한국에 처음 들어온 개신교는 교육과 의료라는 문명의 매체를 통해 선교 사업에 매진했다. 근대사회의 형성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교육과 의료에 종교를 결합시켜 종교와 세속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는 전략을 취한 것이다. 문자를 가르치고 몸을 치료하는 종교의 이미지는 해당 종교가 성공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양분이었다. 현재 많은 종립학교에서 종교 교육이 공식적으로 이뤄지고 있지만, 이에 대해 마땅한 공적 입장을 취할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여전히 한국 사회는 학생들의 종교적 감수성이 일방적인 종교 교육에 의해 희생되는 것에 대해서는 그리 예민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실 한국에 존재하는 종교들의 교세는 학교를 몇 개나 소유하고 있는지에 따라서 서열화 된다. 특히 어마어마한 부의 축적을 가능하게 하는 대학 설립은 많은 종교단체의 꿈이다. 대학을 통해 종교를 학문의 영역 안으로 끌어들이는 전략뿐만 아니라, 대학에서 이뤄지는 종교와 학문의 강력한 접합 및 교환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선교 효과를 사회 전반에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사학법 개정 과정에서 대부분의 기독교계 종립학교는 ‘건학 이념’을 내세우면서 반대 의견을 피력했다. 이들은 학교를 공적 자산이 아니라, 해당 종교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정부도 사법부도 교권 침해 문제부터 시작해서 종교에 대한 박해 논란까지 감수하며 종교라는 벌집을 가급적 건드리지 않으려 한다. 따라서 사립학교라는 틀에 종교라는 아우라를 덧입힐 때 학교는 무소불위의 종교적 공간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사학법 개정을 통해서 개방형 이사제를 도입한다고 했을 때, 종교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재산권 침해의 문제였을 것이다. 이제는 학생들의 등록금과 국고지원금으로 버젓이 선교활동을 하더라도 이것을 견제할 만한 장치가 거의 없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의 사학법 개정을 저지하기 위해서 많은 기독교계가 종립학교 폐교와 신입생 배정 거부 등의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서 사학법 개정에 반대했다. 이러한 사건은 학교가 종교의 포교장일 뿐만 아니라 종교의 가장 중요한 선교 재원임을 짐작하게 한다.

   
▲ 지난 2010년 12월에 개소한 소망교도소는 국내 최초 기독교 민영 교도소이다.

  요즘 기독교 재단에서 세운 국내 제1호 민영교도소인 소망교도소가 종교 편향과 선교 문제로 논란을 겪고 있다. 소망교도소는 부지와 건물만을 기독교 재단에서 마련했을 뿐 연 54억 원의 재원을 정부에서 지원받고 있기 때문에 죄수들을 상대로 하여 기독교가 국가의 지원 아래 교도소 선교를 하는 것 아니냐는 논란을 낳고 있다. 사실 교도소는 종교가 가장 좋아하는 개종의 공간이다. 마치 원시인을 문명인으로 만들었던 것처럼 죄인을 선인으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기독교의 선교 모델에 가장 어울리는 일일 것이다. 최근 소망교도소에 대한 불교계의 공격이 거세지자, 기독교 쪽에서는 템플스테이나 불교문화재 등을 거론하면서 불교도 마찬가지로 국고 지원에 의한 종교적 혜택을 입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사실 우리의 기대와는 다르게 국가와 종교는 이제 거의 숙명적인 의존 관계 속에 놓여 있다.

  원래 교도소는 18세기 후반에 영국에서 기독교인들에서 의해서 만들어진 발명품이었다. 그 이전에 범죄에 대한 처벌은 신체형이 일반적이었지만, 이제 일정한 곳에 감금하여 범죄자의 자유와 시간을 제거하는 것이 처벌의 일반적인 방식이 된 것이다. 범죄를 저지르면 교도소에 가야 한다는 근대 사법의 처벌 방식은 많은 부분 기독교적인 죄의 관념에 기초하고 있다. 어찌 보면 국가의 가장 종교적인 장소는 바로 죄를 정화하는 교도소이다. 교도소는 처벌의 장소가 아니라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내는 장소라는 점에서 처음부터 종교적으로 프로그래밍된 공간이다. 기독교와 교도소의 결합은 근대국가에서 종교가 가장 적극적으로 가시화되는 장소이며, 어떤 학자는 그러한 종교의 모습을 ‘프리즌 릴리전’이라 부르기도 한다.

  실제로 최근 들어 이뤄지는 기독교 선교는 법적 보호 밖의 공간을 주로 겨냥하고 있다. 전쟁과 자연 재해로 인한 난민, 탈북자, 불법체류자, 다문화 가정은 모두 국가의 견고한 틀 밖에서 부유하는 존재들이다. 특히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선교에서 보았던 것처럼 이슬람 세계와 같이 전쟁으로 초토화된 곳은 기독교가 가장 좋아하는 선교의 공간이다. 기독교 선교의 역사는 항상 그렇게 종교와 국가의 틈새에 존재하는 모호한 공간을 공략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적인 장에서 이뤄지는 기독교의 공적 선교는 단지 병리적인 일탈 행위가 아니라 매우 근대적인 종교 현상의 하나로 서술되어야 한다. 이제 기독교는 교회가 아니라 학교와 교도소에서 가장 기독교다운 모습을 보여줄지도 모른다.

종교의 딜레마

  최근에 종교인과 종교단체에 대한 과세 논란이 불거지자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것을 기독교에 대한 모독으로 생각했다. 이것은 ‘영적인 일을 하는 목사’를 ‘밥벌이를 하는 노동자’로 취급하는 처사이고, 교회를 상업적인 매장 정도로 생각하는 불경한 언동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들이 지닌 자기 종교에 대한 이념적 기대 때문이다. 사실상 현실에서 목사들은 여전히 교회의 재산을 개인의 재산으로 착각하고 있고, 교회와 신자를 매각하고 있으며, 자식에게 교회를 상속하기 위해 편법 행위를 일삼고 있다.

  이제 기독교인들도 왼손이 한 일을 오른손은 전혀 모르고 있다는 듯한 태도를 취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왼손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똑바로 직시할 필요가 있다. 이미 우리는 기독교가 운영하는 신문사와 기업, 기독교를 대표하는 정당, 심지어는 기독교를 위해서 일하는 무수한 정치인, 국가조찬기도회에서 무릎 꿇고 통성기도를 하는 대통령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보이는 선교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선교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사회에서 종교와 정치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차원에서 은밀하게 이종교배를 통한 돌연변이를 양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선교에 비판의 초점이 모아졌던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사실 종교인이 자신이 듣고 체험한 ‘좋은 것’을 다른 이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열정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그래서 예의바른 보통의 사람들은 그러한 종교인의 기쁨과 행복을 침해하지 않기 위해서 그의 말을 어느 정도까지는 들어주는 배려를 하게 된다. 그런데 바로 이때부터 최초의 현상이 역전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종교인이 타인의 좋음을 염려했지만, 이제는 타인들이 종교인의 좋음을 배려해야 하는 정반대의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도대체 얼마나 더 배려해야 그것이 종교에 대한 시민사회의 적절한 배려가 될 것인가? 종교 문제는 대부분 이러한 딜레마에서 시작된다. 종교는 다른 것인데, 이렇게 다르지 않게 취급해도 되는 것인지에 대한 판단 불가능이 우리의 발목을 붙잡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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