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상복 / 목포대 정치언론홍보학과 교수


과거의 기억과 그것의 공간적 재현은 일종의 정치성을 함의한다. 따라서 과거의 기억과 그것이 재현되는 공간을 문화, 정치적 시각으로 조망함으로써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는 기억과 공간의 정치문화사를 비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나아가 현재 한국 사회의 기억과 공간의 재현 방식을 성찰해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글 싣는 순서 : ① 북한과 극장국가   ② 광화문 광장의 정치문화사  ③ 추모공간과 전쟁기념비  ④ 다크투어리즘  ⑤ 어떻게 기억을 재현할 것인가

 



  프랑스의 공식 얼굴인 ‘마리안느’의 탄생과 진화를 추적해온 역사학자 마우리스 아귈롱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국가의 형태와 그 원칙을 바꾸는 일은 곧 그것의 상징을 없애고 다른 상징을 창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의미한다. 조각상 하나를 부수면 그것을 다른 것으로 대체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자연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열정도 빈 공간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이상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투쟁의 한가운데에서 항상 수단이자 동시에 결과였다.”

  이는 프랑스의 근현대사를 반영하고 있는 정치적 명제이지만, 서울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광화문 광장’은 그 명제가 한국의 정치사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다. 조선의 건국이라는 역사적 연원을 갖는 광화문 광장은 탄생 이래 수많은 권력체가 자신들의 정치적 의지를 표상하는 공간으로 존재해왔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난 2009년 8월에 완공돼 개방된 광화문 광장은 시민과 국민들의 일상적 여가와 문화 향유, 그리고 교류의 공간으로 재탄생했다는 점에서 권력의지와는 무관한 탈정치적인 공간인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서울시가 건립한 ‘광장’의 본질은 지방자치시대에서 문화권력 혹은 이미지권력의 현대적 부상을 알리는 정치적 스펙터클이기 때문이다.
 

광화문 광장, 권력 의지의 역사

  광화문 광장은 조형될 때부터 왕조권력, 식민권력, 근대화권력, 문민권력, 참여권력, 지역권력 등 근세 이후 한국정치를 주조해 온 정치권력들의 의지와 열망을 온몸으로 끌어안으면서 살아야 할 운명이었다. 그 예외적 파노라마를 이해하려면 탄생사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즉 ‘광장’은 정치적 격랑 속으로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는 요소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말이다. 

  우리는 광화문 광장을 독립적 혹은 고립적 공간이 아니라 경복궁, 그리고 그 정문인 광화문과 존재론적?의미론적으로 연결된 장소라는 관점 속에서 바라봐야 한다. 조선을 개국한 새로운 권력집단은 정치인류학적 보편성의 논리를 따라 왕국의 정치적 중심을 남쪽으로 옮기고 그곳에 왕궁을 세웠다. ‘왕조의 설계자’로 불린 정도전은 궁궐의 상징론적 의미를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신은 상고하건대 궁궐이란 임금이 정사를 다스리는 곳이요, 사방이 우러러보는 곳이요, 신민들이 다 나아가는 곳이므로 제도를 장엄하게 해서 위엄을 보이고 이름을 아름답게 지어 보고 듣는 자를 감동하게 해야 합니다.” 정도전은 성리학적 통치이념을 반영하는 궁을 꿈꿨다. 그는 고대 주나라의 궁성 건립원리를 기록한<주례>(장인 편)의 ‘삼문삼조’와 ‘남면’의 원칙을 따라 왕궁을 짓고 궁과 전들의 명칭도 스스로 지어 올렸다. 그 이름들에는 새로운 군주가 백성을 다스릴 때 지켜야 할 정치윤리학적 원리가 담겨져 있었는데, 그런 면에서 경복궁은 군주 단독의 통치가 아니라 왕과 신하가 함께 나라를 다스리는 이른 바 ‘군신공치제’의 원리를 반영하고 있는 곳이었다. 의정부와 육조 관아가 배치돼 있던 광화문 앞의 육조대로(지금의 광화문 광장)는 그러한 통치이념의 공간적 구현체였다. 본래 중국의 궁성 조형 원리를 따르자면 육조대로는 군주의 위엄을 의미하는 주작대로로 불려야 했지만 조선의 통치계급은 신하의 정치적 역할과 위상이 부각되는 육조대로로 작명했다.  

   경복궁-광화문-육조대로로 이어지는 조선의 중심은 유교 통치이념을 따라 조밀하게 구성된 정치적 공간이었다. 하지만 그 공간은 정도전의 정적인 태종(이방원)에 의해 부정됐다. 태종은 부왕의 뜻에 굴복해 마지못해 한양으로 환도했음에도 정도전의 정치미학이 응축돼 있는 경복궁으로는 들어가지 않았고 옆에 창덕궁을 지어 살았다. 태종은 강력한 왕권의 구현을 이상으로 삼아 군주와 신하가 권력을 공유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는데, 그가 경복궁과 광화문을 버린 것은 그런 면에서 논리적인 귀결이었다. 경복궁-광화문-육조대로가 부활하기 위해서는 아들 세종의 등장이 필요했다. 세종은 즉위식을 경복궁에서 거행하고 즉위 8년째부터는 경복궁으로 옮겨와 살았는데, 그러한 파격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아버지보다는 할아버지의 통치이념을 따르려 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태종이 사망한 뒤 그가 보인 일련의 통치행태들은 아버지에 의해 부정된 군신공치제가 다시 시작되고 확장될 것임을 보여주는 예들이었다. 이는 경복궁으로 향하는 세종의 이어에 치밀한 상징론적 논리가 숨어 있었음을 말해준다. 

  임진왜란으로 전소된 뒤 경복궁과 육조대로는 오랫동안 망각의 공간으로 존재해왔다. 선조 이후 군주들은 궁과 공간의 복원을 말하면서도 자신들의 의지를 실천하지는 않았다. 그것의 화려한 재탄생은 흥선대원군에 이르러 실행됐다. 고종의 아버지는 자신의 비공식적 권력을 동원해 기억 속에서 사라진 조선의 정궁을 더 큰 규모로,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복원했다. 모든 저항을 물리치면서 이뤄낸 복원은 곧 세도정치에 의해 흔들리는 왕조권력의 상징적 부활을 시각화하는 행위였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의 건축 미학에는 자신의 권력의지도 투영됐는데, 그것도 광화문의 현판과 육조대로의 관아 배치를 통해 나타난다. 훈련대장 임태영이 현판을 쓰게 하고, 본래 예조가 있던 자리에 삼군부를 배치해 예조를 한성부 자리로 옮겼다. 그것은 비변사를 대신해 군사업무를 총괄하는 삼군부가 의정부와 마주보는 구조로의 변화를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는 광화문과 육조대로의 공간 속에서 관철되고 있는 당대 최고 권력자의 의지를 볼 수 있는데,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기반이 ‘무신’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일본 식민권력이 상징통치의 핵심적인 무대로 경복궁과 광화문과 육조대로를 택한 것은 그러한 역사적 배경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그 공간의 부정은 역으로 제국주의 권력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알려진 것처럼 일제는 궁의 중심에 조선총독부를 건립하고, 그곳에서 박람회를 개최하고, 광화문을 해체해 궁의 동쪽으로 이축하고, 육조대로의 방위를 비틀고, 그곳을 제국의 행정기관들로 채웠다. 그러한 야만적인 공간 왜곡은 본질적으로 식민지 백성들에게 왕조의 퇴락을 적나라하게 보여줌과 동시에 조선총독부와 남산의 조선신궁이 하나로 이어지는 공간 구축을 통해 제국주의의 위엄을 극화하려는 의지의 소산이었다.
 

‘정치’가 빠진 상징정치

  박정희 정권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근대화권력이 보인 광화문(광장)에 대한 정치적 관심은 일제가 수행한 상징통치의 부정에서 시작된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정한 의미의 복원은 아니었다. 권력은 경복궁 앞에 광화문을 재건했는데, 명목으로는 일제가 건립한 조선총독부를 가린다는 것이었지만 그 속에는 보다 깊은 이념적 의도가 숨어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목조가 아니라 철근콘크리트로 광화문을 세우고 한글 현판을 올림으로써 경제성장과 근대화를 표상하는 상징적 건물을 만들고, 전통국가의 군주가 수행한 편액의 상징정치를 재현하고자 했다. 광화문 광장을 대로로 만들고, 사람들이 그 아래 지하도로 통과하도록 한 것은 광화문에 그려진 국가주도의 경제적 근대주의에 정확히 조응하는 일이었다. 

  광화문 광장에 투영된 권력의지는 문민정권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표출됐다. 김영삼 정권은 ‘신한국’의 국가적 모토를 시각화하기 위해 경복궁 안 구조선총독부 건물의 해체를 결정하고 실천에 옮겼다. 그리고 광화문 광장은 역사적 정통성 확립의 국민적 스펙터클을 연출하는 정치적 무대로 활용됐다. 경복궁의 공간 구조를 방해하고 있던 조선총독부가 사라진 뒤에 남은 과제는 광화문과 광화문 광장의 복원이었다. 참여권력은 광화문의 목조 복원을, 그리고 서울의 지역권력은 광장의 복원을 선포했다. 복원의 상징적 조치로써 교체를 결정한 광화문의 한글 현판은 박정희의 서체라는 점에서 유홍준과 김형오의 이념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복원된 광장은 정치적 기능이 배제됨으로써 광장의 존재 이유를 둘러싼 갈등적 논의의 대상이 됐다. 

  광화문 광장의 탄생과 진화의 역사는 본질적으로 권력의지의 역사다. 그곳은 대립되고 모순되는 권력체들의 이미지 열망이 만들어낸 정치적 퇴적물이다. 우리가 광화문 광장을 단순히 놀이와 여가의 장소로만 볼 수 없는 이유다. 그런 면에서 지금의 광화문 광장은 실패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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