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명교 / 한국예술종합학교 영화과 4학년

 
 

지난 2월 25일은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지 4년째 되는 날이었다. 이날 이 대통령은 지난 정권과 민주통합당에게 표적을 돌리는 다소 결기 넘치는 담화문을 발표했고, 야권에서는 그것이 후안무치한 태도라며 비난했다. 우리가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흘려보내는 무수한 정치 뉴스들은 대개 이런 식으로 부르주아 분파 사이에서 이전투구의 무한반복으로 장식된다. 사실상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본질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는 제대로 다뤄지지 않는다.

물론 KTX 민영화 같은 첨예한 사안에서 정치권의 대립을 종종 엿볼 수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정치적 스탠스의 문제일 뿐, 민주주의라는 원칙에 입각한 태도로서는 아무 일관성이 없다. 여야의 자리 중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신자유주의적 조치에 대한 입장이 번복됐던 것을 돌아본다면 이것이 단순히 여론을 의식한 표면적인 제스쳐에 불과하단 것을 알 수 있다.

“민주주의는 실패했다.”(최장집)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모두 민주주의자이다.”(웬디 브라운) 독재자의 딸이자 보수진영의 대권주자에서부터 소위 개혁세력의 여러 대권주자들, 그리고 맑스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다양한 수사를 덧붙여 민주주의를 말한다. 이처럼 민주주의는 전례 없는 인기를 누리고 있지만 그것의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너무나 모호하고 두루뭉술할 뿐만 아니라, 공허하기까지 하다.

어쩌면 사람들은 단지 각자의 ‘민주주의들’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일 뿐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합의하지 않았던 것인지 모른다. 이를테면 현재까지 존재하는 유일한 합의는 그것을 복수로 분할하기로 한 것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민주주의는 맥락에 따라 각각 다른 것을 의미하며 의미를 분할 점유한 주체들은 그것을 전유하기 위한 투쟁의 링 위에 올라와 있는 것뿐이다.

이를테면 민주주의는 ‘텅 빈 기표’가 돼버렸다.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가 곤경에 직면했다는 걸 알면서도 그것을 지배하는 이 ‘상징’으로서의 민주주의에서 우린 좀처럼 자유롭지 못하다. 더군다나 우리가 그것에 대해 어떤 가혹한 비판을 가하더라도 민주주의자라는 안전핀을 뽑지 않는 이상, 이 텅 빈 기표의 통치체제는 위협받지 않을 것이다.

위기에 빠진 민주주의는 자본주의 체제가 효율적으로 운영되는 데 필요한 근간을 흔들 정도로 사회적 통합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늘어난 자살율과 폭력사건, 살인, 방화 등 정념들의 폭증이 점점 더 통제되지 못하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정치의 공백에 대안 없는 정념만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여러 가지 난망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민주주의라는 기표를 둘러싼 ‘무의미함’의 의미를 보다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실제로 민주주의라는 용어가 아무것도 의미화하지 못하는 현 상황에서 민주주의는 다시금 ‘발명’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우리 중 누구도 미래에 대해 알 수 없다. 더군다나 민주주의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목표이자 끝없이 지속돼야 하는 기획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새로운 권력을 창출하는 데 다가서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민주주의에 대한 우익적 전유로서의 ‘인민주의’가 사회 곳곳에 발호되고 있는 현상을 보고 있다. ‘진보’의 탈을 뒤집어쓴 각종 포퓰리즘적 선동이 판을 치지만 어디에도 인민의 삶을 개선시킬 핵심적 진의는 보이지 않는다. 이것의 귀결은 명백하게 정치의 소멸로 치달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민주주의를 탈-전유하기 위한 기획이 필요하며, 우리 앞에 당도한 인민주의를 마냥 조롱하지 않고 진지하게 다루는 것에서 재출발해야하는 것이다.

이명박 정권 하 한국사회는 심각한 ‘민주주의의 후퇴’와 ‘사회경제적 퇴행’을 겪고 있다. 특히 빈곤과 사회적 양극화의 심화, 비정규직화, 실업자의 양산 등의 퇴행은 한국사회에서 민주주의 후퇴와 맞물려 우리를 총체적인 위기 상황으로 몰아넣고 있다. 그러나 한국사회의 위기의 원인이 특정 정권만의 문제는 아니다. 도리어 이 총체적 위기의 원인은 ‘신자유주의’에 있으며, 이 점에서 지난 ‘김대중-노무현 정권’과 ‘이명박 정권’은 긴밀한 연속성을 지닌다. 따라서 이런 연속성을 극복하기 위해선 ‘정권교체’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신자유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주체가 아래로부터 형성돼야 한다. 대중들이 신자유주의적 시장지배를 내면화하면서 보수화됐고, 지역에서의 일상적인 삶에서의 정치주체의 형성이 실패했기 때문이다.

당대의 많은 철학자들은 민주주의에 대안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아주 조심스럽게 그것에 대해 확정적으로 말하기를 거부하거나 “잘 모르겠다”고 매우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이것은 공산주의적 기획의 좌초와도 맞닿아 있는 어떤 징후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일시적인 유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함께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이념과 실천 사이에 놓인 시차적 간극을 돌파하기 위해서라도 임시적인 것일지언정 구체적인 테제를 도출할 필요가 있다.

우선 나는 이렇게 말하고자 한다. 오늘날 정세에서 민주주의가 ‘상징’으로써 발화되는 것은 전면적으로 거부돼야 한다. 그러니까 구태여 ‘민주주의의 진의’ 따위를 논하는 것은 별로 쓸모가 없을 가능성이 크다. 그것은 완전히 새롭게 구성되지 않으면 안 된다. 저항주체가 소멸된 시대에 아래로부터 대안적 주체를 형성하는 것에 그 성패가 달려 있다. 따라서 몫이 없는 자들이 일상적 실천을 통해 지배질서에 대한 불만과 생활세계의 욕구를 공유하며 참여할 수 있는 대중운동을 유한하고도 무한한 ‘지역’으로부터 모색해야 한다. 자본과 시장, 사유화, 개발, 양극화, 배제, 지배에 맞선 공공의 연대와 운동의 발명이 필요하다. 그때 대안적 체제의 정치주체를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 묻는 것만이 우리가 각인해야 할 하나의 질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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