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용근 / 홍익대 법과대학 교수

 
 

대의제는 본질적으로 신임과 책임, 통제와 절제를 바탕으로 하는 통치기관의 구성원리인 만큼 독재, 전제, 전제주의 체제와는 조화될 수 없다. 따라서 권력의 견제와 균형이 요구되며, 입법·사법·행정 사이의 통치 권력의 전제가 요청된다. 하지만 이러한 이론적 접근은 실제로는 큰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3권분립적 사고를 지닌 기존의 대표제에서는 실질적으로 국가권력이 독점화되고, 국가기관 사이의 권력분립은 밀실에서 야합으로 실행되곤 했기에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전자민주주의 하에서의 국민의 적극적 참여와 국민에 의한 실질적 권력통제의 메커니즘으로 보인다.

대표제는 대표자 간의 책임과 통제 관계의 정비가 전제되지 않으면 실질적으로 그들만의 리그, 즉 정치적으로는 과두정의 형태로 악용될 수 있다. 하지만 기존의 이론들은 대표자의 책임을 법적 책임이 아니라 선거 등 여러 통제 수단을 통해 물을 수 있는 정치적 책임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대표자에 대한 국민의 신임은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이러한 신임을 형성하는 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선거제도이다. 하지만 위의 일반론적인 주장은 현실적이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정치의 관심이 높은 데 비해 선거 참여율이 점점 더 낮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국민 참여 수단의 결여, 기성정치인의 지속적인 권력의 장악 등이 중요한 원인으로 보인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기존의 정치권력에게만 맡기는 것은 이미 수 세기 동안의 정부 실패로 미루어 볼 때타당하지 않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전자민주주의라는 시대에 맞게 국민들이 실질적으로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국민소환제도와 국민발안·국민투표제도 등의 도입이 필요하다.

자질론과 엘리트 정치
대의제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대표자의 자질과 능력을 강조하면서 ‘엘리트 정치’를 강조한다. 여기서 대표자의 자질, 능력이 강조되는 것은 대표자가 특수 이익에 지배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일 뿐만 아니라 대표자가 관료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는 요청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이러한 지도자의 자질로는 도덕적 판단과 지식, 국민에 대한 봉사정신, 경험 등이 필요한데, 현대 사회의 복잡성으로 인해 모든 성향을 고루 갖춘 철인이란 사실상 존재하기 어렵다. 또한 매년 국회에서 벌어지는 폭력적이고 한심한 행태는 엘리트 정치에 대해 심각한 의구심을 자아내게 한다. 실제 각 정당에서 개혁 공천을 한다고 해도 과연 우리 사회에서 도덕과 지식, 경험 면에서 최고의 전문가가 참여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그리고 역사적인 경험에 비추어 생각해보건대, 오히려 대표자의 자질이 독재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됐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양화되고 전문화된 기존의 대표가 모든 사회를 이끌고 지도했던 것이 해악으로 작용한다는 점 때문이다. 이렇게 대표의 자질이라는 것은 상대적이기에 현대에 있어서는 국민들의 자율에 맡겨 이를 도와주는 것이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따라서 과거 플라톤이 꿈꾸던 철인에 해당하는 대표자는 현실성이 없으며, 단순히 이상적인 자질론에 의존하는 것 또한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한다. 오히려 국민들의 참여와 통제를 강화시켜 대의제와 정치체제의 개혁을 하는 것이 더 빠르고 효율적이고 현실적인 방안으로 보인다. 

선거와 관련한 기존의 이론들은 국민들이 정치에 관심이 없고, 대표자의 기능이나 그와의 관계에 대해 아무런 인식을 갖지 않은 채 투표권을 행사하지 않거나 아무렇게나 투표권을 행사한다는 점을 비판한다. 또한 그것이 국민대표제를 파괴하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 대표자의 노예가 되는 것이라고 비난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국정에 참여할 방안이 거의 없고 참여해봤자 국민들의 의사에 따르지 않는 현재의 정치 현실이 국민들의 잘못은 아닐 것이다. 국민들이 자기 지배를 할 수 없는 타자 지배 체제인 대의제의 경우는 국민들의 동기를 유발하는 데 취약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국민들의 관심이 적다는 얘기가 전자민주주의혁명이 태동하고 국민들의 정치적인 모임과 개혁정당 등이 생성되고 있는 우리나라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 든다. 또한 자질론에서 말하는 자질이란 것이 어느 정도를 요구하는지 기준이 모호하고, 민주주의의 비판자들이 주장하듯 자질이 없는 자를 토론과 결정에서 배제시키는 역할을 해왔음을 고려할 때, 자질론은 자칫 독재와 소수자에 대한 타인의 지배를 정당화할 수 있는 문제가 있다. 심지어 도덕적 사건의 경우에는 농부가 교수보다 더 도덕적인 판단을 내릴 수도 있다. 그 이유는 농부는 인위적인 규칙이나 이론에 의해 혼란에 빠지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자질론은 역사적으로 아테네의 제한적 민주주의를 전후하여 독재나 엘리트 정치를 타당화하는 이론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이는 사안에 따라서 뛰어난 대표자조차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다는 것이 자명하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오히려 상당한 능력이 있다는 전문가들의 경우, 많은 참여의 기회와 그로 인한 경험의 축적이 그들을 오늘날 최고의 전문가로 만들었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올바른 정보 제공에 기초한 상시적인 참여의 보장돼야만 진정한 주인인 국민이 완성된다고 할 수 있기에 자질론은 선험적인 자질론이 아닌 경험적인 것으로 정리돼야 할 것이다.   

일부는 직접민주주의가 선동정치의 위험을 내재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대표제가 확립된 오늘날에도 선동정치의 일환인 포퓰리즘이 우리 사회를 포함한 전세계적 문제로 부각되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는 직접민주주의만의 문제라기보다 부정확한 정보에 기초한 다수결의 문제로 보인다. 결국 올바른 정보제공이 중요한 문제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약간의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인터넷과 방송매체의 정보 제공, 그리고 성숙한 토론문화의 정착이 이를 해결할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대표자를 대신하기 위하여
결국 오늘날의 대표제는 프랑스 혁명 당시도 그랬지만 경제적 부담에서 자유로운 부르주아 계층들이 자신의 명예를 고취시키고, 자신의 재산과 이익을 지키기 위한 도구로 전락된 면도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이상론적인 엘리트란 존재하지 않으며, 현재 우리나라의 여야 대표자들 또한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우월한 계층으로 구성된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한 지 오래다. 이제는 국민들이 참여하는 진정한 민주주의 리그로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 

우선 국민들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의회 속으로 끌어들여 이를 용해할 수 있는 선거제도의 개혁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돈과 조직이 필요한 지역구를 늘리기 보다는 전국구를 늘려야 하고 전국구에는 사회소외계층을 비롯한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에게 배정될 필요가 있다. 둘째로는 정당의 민주화와 관련된 것으로, 현대 정당정치 국가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개선하기 위해서 주권자인 국민이 직접 국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 예를 들면 전자정당과 국민경선제를 통한 상향식 공천의 확립이 필요해 보인다. 셋째, 국민의 알 권리를 통해서 현대 정보사회에서의 국정 참여와 비판의 길을 넓히는 한편, 여론조사 결과의 공정성과 정확성을 담보함으로써 국민의 살아있는 의사에 정치인들이 귀를 기울일 줄 아는 현실을 구축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지방자치제도의 활성화를 통해 지방의 문제는 지방민 스스로 결정하는 참여 민주주의의 메커니즘을 적극적으로 실현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가장 강조하고 싶은 바는 하루 속히 직접민주주의제도를 정착시키는 방향으로의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것만이 국민의 영향력과 의미 있는 참여를 가장 잘 보장할 수 있다. 다만 중앙정부의 경우는 다뤄야 할 사안이 복잡하고 전 국민이 참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에 현재로선 요원해보이지만, 지방자치단체 및 기초단체는 사안이 상대적으로 덜 복잡하고 전자기술의 도입에 의한 기술적 보완이 가능하므로, 직접 참여에 의한 지방의회의 대체가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앞으로 입법론적으로 충분히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노력들을 통해서 우리는 더 이상 큰바위얼굴을 기대하기보다는 민주주의가 표방하는 자기지배, 즉 자신들의 인생을 자기가 설계하고 그 계획에 따라 자신의 인생을 아름답게 살 수 있는 삶의 방식을 정착시킬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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