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홍식 / 숭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유럽의 분위기가 심상찮다. 국가 재정이 연쇄적으로 무너지고 사회적 혼란이 급증했다. 유럽이 꿈꾸던 지상 최대의 실험이 성패의 기로에 서 있다. 사회 통합에 관한 여러 고민이 필요한 시점에 우리가 세계시민으로서 유럽의 위기에 주목해야 할 이유는 그래서 충분하다. <편집자주>

 

유럽의 위기, 통합의 위기
글 싣는 순서 
① EU의 위험한 결함   ② 그리스 파산과 유럽 경제 위기  ③ 유럽의 다문화주의 딜레마  ④ 민주주의의 분노  ⑤ 통합의 길
 

 

 
 

 

지난 2010년 봄, 세계 경제 위기가 유럽의 약한 고리인 그리스를 강타한 후 유럽의 몰골은 만신창이가 됐다. 그리스에서 시작된 재정 위기는 포르투갈, 아일랜드, 스페인, 이탈리아 등으로 확산됐으며, 심지어 2011년 말에는 유럽의 핵심을 형성하고 있는 프랑스마저도 최고의 국제신용등급을 상실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미국과 함께 세계 경제를 주도했던 유럽이 이제는 BRICs 중심의 개도국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프랑스 칸에서 개최된 2011년 G20 정상회의나 2012년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서 브라질과 멕시코의 대통령은 자국의 위기 극복 경험을 들면서 유럽을 훈계했다. 2012년 초에는 메르켈 독일 총리가 중국에 방문해 도움을 요청했지만 중국은 섣불리 나서지 않았다. 도대체 어떤 이유로 유럽은 이 지경에 이르게 됐는가.

유로가 국제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한 것은 정확하게 10년 전의 일이다. 당시 유럽 11개국의 계산은 단일 시장에 해당하는 하나의 거대한 화폐 지역을 형성하면서 안정적인 경제 환경을 누리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안정성을 확보하는 데 따르는 대가는 경제 정책의 독립성과 유연성의 상실이었다. 수많은 국가가 하나의 화폐를 사용하려면 이와 관련된 모든 결정과 정책이 통합돼야 하고, 이는 전통적인 국가 주권과 권력을 상당 부분 포기하는 것을 의미했다. 영국이나 스웨덴, 덴마크 등의 국가는 유럽연합의 중요한 회원국임에도 불구하고 유로의 도입을 거부하거나 뒤로 미뤘다. 경제적 이익을 위해 정치적 자율성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달리 표현해서 유럽이라는 공동 운명체의 배에 오르기를 거부한 셈이다.

유로는 2010년 글로벌 위기로 휘청거리기 전까지 매우 성공적인 실험으로 평가됐다. 초기에 국제 금융시장은 유로를 신뢰할 수 있을지 망설이는 듯 했지만 상당히 빠른 시기에 유로를 달러에 상응하는 국제화폐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달러 대비 환율을 살펴보면 초창기에 1.1로 출발해 0.8 수준까지 하락했다가 1.5이상으로 상승했다. 유로의 가치에 대한 신뢰가 깊어진 결과다. 현재 유로의 위기 속에서도 그 가치는 여전히 1.2-1.3달러 수준이다. 최근 재정 위기를 맞고 있는 국가들은 전반적으로 유로를 통해 가장 많은 경제적 이익을 챙긴 나라들이다. 화폐 통합의 결과로 이들 지중해 국가들은 독일과 같은 수준의 시장 신뢰도를 획득했고, 그 덕분에 낮은 이자율로 쉽게 자금을 동원해 지출하면서 경제 붐을 누려 왔다.

하지만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 위기가 전세계로 확산되면서 사정이 돌변했다. 하나의 화폐를 사용한다는 이유로 독일과 그리스에 같은 이자율로 돈을 빌려주던 국제 금융세력이 국가에 따라 차별을 두기 시작했다. 독일에게는 여전히 낮은 이자율을 적용하지만 그리스나 포르투갈에게는 점점 높은 이자율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결국 이들은 국가 부도의 위험에 직면하게 됐다. 과거 1980년대의 중남미나 1990년대의 동아시아를 비롯한 모든 금융 위기의 근원에는 싸게 빌린 돈을 비싸게 갚아야 하는 국제 금융시장의 급변화가 자리한다. 일반적으로 국가 부도의 위기에 처한 나라는 화폐의 평가절하를 통해서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고 위기에 대응했다. 문제는 그리스나 포르투갈의 경우 이미 단일 화폐권에 참여하면서 정책과 결정의 자율성을 포기했기 때문에 평가절하라는 일반적인 해결책을 활용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일부에서는 그리스와 같이 위기를 맞은 국가들이 유로권에서 탈퇴해 전통적 평가절하를 통해 대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유로권 탈퇴야말로 경제적 자살 행위가 될 것이라고 분석한다. 게다가 한 번 유로권에서 탈퇴하면 예측 가능한 미래에 다시 진입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유럽에서 영원한 변방으로 추락하는 셈인 것이다. 재정 긴축에 반대하는 시위가 지속되는 그리스에서도 국민의 70%는 유로권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허리띠를 졸라매면서도 유럽에서 낙오자가 될 수는 없다는 정치경제적 입장은 그리스, 포르투갈, 아일랜드, 스페인은 물론 이탈리아와 같은 유럽 대국에도 적용된다. 오죽하면 위기의 압력 때문에 총리 자리에 그토록 집착하던 베를루스코니가 하야를 하게 됐겠는가.

 

위기의 역설과 극복 대책


일반적으로 하나의 화폐를 사용하는 것은 하나의 국가다. 따라서 특정 지역에 문제가 생기면 중앙정부의 재정 이전을 통해 위기 지역을 지원하게 된다. 유럽의 경우 많은 정책이 통합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재정 정책은 여전히 각 회원국 담당이다. 따라서 그리스의 문제에 유럽연합이 예산 지원을 하기 어렵고, 독일이나 프랑스의 지원도 자동적이지 않다. 매번 마라톤협상을 통해 지원 액수와 조건을 결정해야 한다. 이것이 유럽 위기가 해결의 기미를 보이지 못하고 반복되는 이유다. 또 다른 해결 방법은 중앙은행이 최종적 대부자 역할을 맡아 위기 국가의 채권을 사들이는 것이다. 유럽중앙은행(ECB)은 공식적으로 최종적 대부자라고 밝히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유사한 역할을 담당하면서 상황이 악화되는 것을 막았다.

매우 느리긴 하지만 유럽은 이번 위기를 계기로 장기적인 제도 보완에 착수한 것으로 보인다. 첫째, 회원국에 공통된 재정 안정 장치를 통해 무책임한 부채의 누적을 막을 수 있는 제도를 보편화할 예정이다. 둘째, 재정적 이전을 통해 위기가 발생하는 회원국을 기타 회원국이 지원하는 제도를 마련하는 중이다. 셋째, 일명 방화벽을 통해 위기가 발생하더라도 다른 국가로 확산되는 것을 막는 장치를 개발하고 있다. 이상의 세 가지 방향을 종합하면 하나의 화폐라는 통화 통합과 하나의 예산 정책이라는 재정 통합으로 발전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아직 합의가 이뤄지진 않았지만 유로권의 공공 부채를 공동 관리하는 유로 본드의 아이디어도 유럽연합 어젠다에 올라가 있다.

이번 경제 위기의 역설은 경제 위기가 유로권의 다양한 문제를 첨예하게 드러나게 함으로써 그에 대한 대비책의 마련이나 개혁을 앞당겼다는 점이다. 사실 유럽이 화폐를 통합하면서 재정이 분열된 현 상황의 문제점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국제경제학 개론에 나오는 적절한 화폐권 기준에 유럽의 현실이 미치지 못한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이론적인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유럽은 공동 운명의 배를 만들었고, 그곳에 올라타는 모험을 시작했다. 암초에 부딪칠 수도 있고, 태풍을 만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항해를 포기할 수는 없는 정치적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함께 하겠다는 정치적 의지 말이다. 역으로 공동 운명을 향한 정치적 의지가 없는 영국과 같은 나라는 아예 배에 올라타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따지자면 득보다는 실이 더 많을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융의 세계 중심인 영국은 세계 최대 경제권의 단일 화폐를 거부했다. 그들은 파운드의 포기를 원치 않았으며, 자신들의 화폐 정책이 바다 건너 프랑크푸르트에서 결정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상의 거시 역사적 깊이를 무시하고 유로권의 문제를 들여다보면, 이는 언제라도 무너질 수 있는 종이호랑이나 카드로 만든 성처럼 보인다. 새로운 제도의 형성이 항상 그렇듯이 유럽 통합의 역사도 시도와 실수가 반복되는 과정에서 새로운 것을 학습하고 수정하면서 이뤄졌다. 유로권은 글로벌 경제 위기의 파도에 붕괴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난 2년 동안 유럽 국가들이 보여준 행태는 비록 느리고 미흡하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타고 온 배에서 뛰어내릴 나라는 없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오히려 암초를 만날 때에 대비해 철판으로 배를 강화하고 폭풍을 넘기 위해 신속한 대응체제를 마련하는 모습이다.

한국에서 유럽 위기와 관련한 언론보도를 접하면서 아쉬운 점은 프랑스나 독일의 매체에 등장하는 유럽의 분위기와는 상관없는 영미 중심의 보도에 과도하게 의존한다는 사실이다. 달러를 위협하는 유로가 싫고, 파운드를 흡수하려는 유로를 증오하는 두 나라의 언론이 가진 관점과 편향을 앵무새처럼 그대로 반복한다. 마치 당장이라도 유로가 붕괴될 것처럼 호들갑을 떨면서 말이다. 이 문제는 비단 유럽의 위기나 유럽통합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한국 사회를 주도해야 하는 언론의 세계관과 의식을 전체적으로 관통하는 대미 의존도를 반영하는 것이라 더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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