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종수 /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석사과정

과거의 기억과 그것의 공간적 재현은 일종의 정치성을 함의한다. 따라서 과거의 기억과 그것이 재현되는 공간을 문화, 정치적 시각으로 조망함으로써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는 기억과 공간의 정치문화사를 비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나아가 현재 한국 사회의 기억과 공간의 재현 방식을 성찰해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글 싣는 순서 : ① 북한과 극장국가   ② 광화문 광장의 정치문화사  ③ 추모공간과 전쟁기념비  ④ 다크투어리즘  ⑤ 어떻게 기억을 재현할 것인가

 

 

 

팔만대장경은 한국의 자랑스러운 유산으로, 그 놀라운 규모는 지금도 우리를 압도한다. 당시의 상황에서 이러한 경판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백만이 넘는 연인원이 요구된다. 그러나 이렇게 대단한 유산이 패전 후 사회가 붕괴 직전에 이르렀을 때 제작됐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사실이다. 당시 고려의 체제는 무너지고 국토는 유린당했다. 어려운 상황에서 만들었기에 더욱 팔만대장경이 위대하다는 감상은 잠시 접고 관점을 바꿔보자.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죽고 몰락의 위기에 직면한 국가가 수십만 명의 사람을 동원하여 경판을 만들었다. 이러한 현상을 현재 우리의 상식으로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고려가 불교를 믿는 국가였기 때문일까? 혹은 너무도 절박한 상황이 그들에게 비상식적인 행위를 하도록 강요한 것일까?

당시의 고려와 비슷한 상황에 놓인 국가가 바로 북한이다. 북한은 90년대부터 시작된 대기근의 와중에서도 금수산 기념궁전과 영생탑, 각종 기념 조형물을 전국 방방곡곡에 새로 건립했다. 그리고 십만 명을 공연에 동원해 유래 없는 규모의 아리랑 축전을 개최했다. 외부에서는 이러한 북한 사회를 머지않아 붕괴될 국가라는 관점으로 바라봤다. 그러나 북한은 대기근을 견뎌냈고, 김일성-김정일-김정은에 이르는 3대 세습을 안정적으로 완료한 듯이 보인다. 이쯤 되면 대기근 당시 북한에서 일어난 일들을 체제가 붕괴하기 직전에 벌어진 이상한 현상들로 여기는 것은 석연찮다. 팔만대장경을 만든 고려도 그 후 약 200여 년 간 체제를 유지했다. 팔만대장경과 북한의 아리랑 축전을 아우르는 이상한 현상들이 바로 체제 유지의 비결이었던 것이다.

 극장국가 북한

우리는 흔히 국가권력을 관료, 군대, 경찰 등의 강제적 힘을 독점하는 것으로 정의한 막스 베버의 정치권력 개념에 익숙하다. 물론 북한체제는 이러한 강제적인 힘에 의존하고 있고 그 영향력 또한 지대하다. 그러나 북한을 단순히 폭압적인 정권과 어쩔 수 없이 그에 굴복하는 민중이라는 구도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이러한 구도는 실제 유지되고 운영되는 체제로서의 북한에 대한 많은 오해를 낳았다. 따라서 우리는 현실 정치에 대해 좀 더 다원화된 개념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상징인류학자 클리퍼드 기어츠가 제시한 극장국가의 개념이 바로 우리의 이해를 도울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기어츠는 인도네시아 발리의 네가라를 통해 극장국가의 개념을 제시한다. 극장국가는 물리적 강제력이 아닌, 화려한 의례와 공연의 반복적 상연에 의해 통치되는 국가다. 극장국가에서 벌어지는 의례와 공연에서 상연되는 것은 왕권의 사회적․우주적 중심성이다. 이는 현재 사람들에게 주어진 삶의 방식을 초자연적인 우주적 질서로 받아들이게 한다. 또한 극장국가에서 왕궁과 수도는 초자연적 질서의 소우주이자 정치적 질서의 물질적 전형이다. 아리랑 축전은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동원돼 우주적 질서를 상연하는 공연이고, 금수산 기념궁전과 영생탑 등의 조형물들은 바로 우주적 질서의 물질적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공연과 조형물이 있다고 해서 극장국가인 것은 아니다. 이 공연과 조형물은 촘촘하게 짜인 상징의 망에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이 상징의 중심에 있는 것이 바로 ‘북한의 신화’다. 수령 이전의 김일성은 널리 알려졌듯이 일제를 상대로 무장투쟁을 한 인물이다. 김일성의 항일투쟁은 역사적 사실이자 김일성이 가지는 카리스마의 원천이다. 실제로 김일성은 항일투쟁을 했던 많은 인물들이 일본에 투항을 하는 와중에도 끝까지 일본에 대한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한 소년이 집을 떠나 조국과 민족을 위해 갖은 고생을 하고, 고향에 돌아와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태양이 된 것이다.

상징으로서 태양은 기존의 질서들을 하나로 묶어나간다. 신화 속에서 김일성의 일대기는 민족의 근대사와 결합한다. 이에 따라 태양은 외세에 대항한 민족의 구세주이고, 민족의 번영과 미래를 지도한 예언자이며, 만인의 어버이이기도 하다. 이 상징적 결합을 통해 김일성은 민족 그 자체가 됐다. 그리고 김일성의 행위는 그 자체가 공연이고 의례가 됐다. 또한 김일성의 일대기를 상징하는 조형물이 평양시의 남서쪽 끝에서 북동쪽 끝까지 줄을 이어 배치됐다. 신화를 통한 상징질서의 창조, 그리고 이 상징질서의 상연은 어느 곳에서나 이루어진다. 이를 통해 김일성과 북한체제는 하나의 우주적 질서로 자리 잡았다. 따라서 북한에서 태어나 삶을 사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도 이 상징의 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러한 신화의 상연은 아리랑 축전에서 최고조에 달한다. 민족의 수난사에서 김일성의 일대기, 그리고 민족이 지향하는 이상적인 국가에 이르기까지 아리랑 축전은 이 모든 것을 총망라한 상징의 향연이다. 공연의 주체는 북한에 있는 모든 사람이다. 이 공연을 위해 김정일과 당의 연출자, 관료 체제, 그리고 북한 주민에 이르기까지 일 년의 준비기간 동안 엄청난 역량을 쏟아부었다. 공연을 위한 훈련은 가혹하거나 강제적이지 않다. 이 공연에 나가기 위해서 북한의 각 지역에서 경쟁을 하고, 또 최종적으로 선발된 참가자들에게는 선물이 주어진다. 이들에게 경연 참가는 자랑스러운 일이며, 말할 수 없는 성취감을 불러일으킨다.

대기근과 같은 위기의 순간에 필요한 것은 위기를 일깨워주는 현실감이 아니다. 오히려 적당히 현실과 거리를 두고 자신이 살고 있는 우주가 공고하다는 것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다. 즉, 아리랑 축전은 기근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란의 축제가 아니라, 위기의 상황에서 국가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국가구성원 스스로의 존재감을 충족시키는 축제인 것이다.

 극장국가의 일상과 미래

매일 아침 북한 주민들은 지도자의 사진을 향해 의례를 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학교에서는 김일성의 일대기를 배우고, 직장에서는 지도자가 세운 건설적인 계획에 따라 일을 시작한다. 달마다 있는 당과 지도자 관련 기념일에는 기념의례가 행해지고 연례행사로는 거국적인 공연과 퍼레이드가 벌어진다. 모든 건물과 도심에는 김일성의 일대기와 당을 상징하는 조형물들이 배치돼 있다. 이렇게 빈틈없이 배치돼 있는 상징과 의례의 공간에서 생활하는 북한 주민들은 어떤 모습일까? 완벽하게 국가에 전도된 열성적인 신자의 모습일까? 혹은 국가에 대한 반발심을 가슴 속에 숨기고 연기를 하는 불행한 사람들일까?
김일성과 김정일이 사망했을 당시 북한 주민들이 흘린 눈물은 거짓이 아니다. 그러나 북한 주민들이 언제나 김일성, 김정일에 대한 찬양을 가슴에 품고 사는 것 또한 아니다. 터무니없는 신화에 대해서 맹목적인 믿음을 보이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체제를 부정하거나 혁명을 꿈꾸는 것도 아니다. 일상공간의 현실감은 신화와 믿음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는다. 여기서는 얼마든지 체제에 대한 불신이나 비판의 감정을 가지고 살 수 있다. 그러나 몰입된 의례에서 사람들은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이며, 대규모 의례의 장중함은 사람들을 신화 속으로 경도시키기에 충분하다.

따라서 북한이 모두 체제에 충성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집단은 아니지만, 외부의 공격이나 내부의 모순에 의해서 산산이 흩어질 집단 역시 아니다. 극장국가 북한은 국가의 고안물이기도 하지만, 주민들 역시 극장국가 구성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내부의 위기가 있으면 공연과 의례가 강화될 것이고, 외부로부터의 압박은 이 공연과 의례에 대한 정당성을 제공하는 동시에 그 체제와 주민들을 더욱 단결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므로 북한의 체제는 상징체계의 변화 없이는 어떤 변화도 기대할 수 없다. 상징체계는 불변의 것이 아니다. 상징체계를 무너뜨리지 않고 받고 받아들일 수 있을 성질의 것이라면 언제든 그 방향과 논리를 바꾸어서 작동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남한과 북한이 화해의 무드 속에서 서로의 체제를 인정한다면 다른 형태의 민족 논리가 작동할 수 있다. ‘헤어졌던 민족이 만나서 새로운 길을 도약한다’라는 형태로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논리가 자리 잡는 다면 언제든 기존의 북한에서 작동했던 김일성-민족의 논리는 불완전한 것으로 전도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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