꺄르르 / <청춘대학> 저자

 

바라 마지아니하였던 민주주의가 고작 이런 것?

꺄르르 / <청춘대학> 저자

 

역사교과서 속 민주주의라는 낱말 앞에 ‘자유’를 덧붙이는 걸 두고 커다란 충돌이 있었는데, ‘자유’를 뇌까리는 이들을 살피다보면 어질어질해집니다. 반공과 독재를 찬양할 자유만이 있던 한국식 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라고 우겨대니까요. 그들의 정신건강이 절로 걱정됩니다. 지난날의 아픔이 채 가시지 않았고 피울음이 아직도 맴도는데, ‘그때 그 사람들’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버젓이 나댑니다. 그들은 오늘날 ‘자유’와 ‘민주주의’가 얼마나 엉성하고 앙상한지 드러내는 살아있는 증거들이죠.

이런 각다귀들에 맞서 ‘민주주의’를 이룩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번에도 어칠비칠해집니다. ‘그 민주주의’의 결과는 거리에서 수많은 이들이 얼어 죽어도 그 사람이 못난 거라며 지나치는 시민들과 해마다 손수 목숨을 끊는 수천의 사람들이니까요.

조폭처럼 구는 10대들부터 대학을 가지 않으면 ‘루저’가 되는 20대까지, 대학 간판에 따라 몸값이 매겨지는 학벌부터 어디서 사느냐에 따라 신분이 드러나는 집값까지, 갈수록 심해지는 양극화부터 사회를 수렁으로 몰아가는 비정규직까지, 미친 등록금부터 돌아버린 스펙 경쟁까지, 날로 어려워지는 결혼부터 도저히 아이를 낳아 키울 수 없는 여건까지,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중년부터 가난과 외로움에 사로잡힌 노년까지, 어지러움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습니다.

앞 세대가 그렇게 바라 마지아니하였던 ‘민주주의’가 고작 이런 것이었나요? 한국의 민주화 운동은 훌륭하고 소중하지만, 그들 가운데 적지 않은 이들은 ‘민주화’를 바란 게 아니라 자신이 거머쥐어야 할 ‘특권’을 저 위에 있는 ‘군바리’들이 누리기 때문에 그게 고까워서 덤벼든 게 아닐까요? 그게 아니라면 그렇게 뜨거웠던 세대가 달랑 투표권 하나 받아들더니 부리나케 머리띠와 허리띠를 풀어버리고 “세상 좋아졌다”며 자기들끼리 킬킬댈 리 없을 테니까요.

모진 고통 속에 민주화를 얻었다지만 정치제도로서 ‘허술한 민주화’였을 따름입니다. 일상의 민주화는 나아지기는커녕 그대로이거나 더 문드러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나이가 많건 적건 권위의식에 찌들어 있으며 길거리와 인터넷에서는 불친절과 언어폭력이 들끓습니다. 왕따가 되지 않고자 똑같은 잠바를 사 입는 학생들은 복사해서 붙여넣기를 한 것처럼 똑같은 교복에, 똑같은 머리모양으로, 똑같은 대학들을 노리며 줄세우기를 당합니다. 순위에서 뒤처지는 걸 받아들일 수 없는 자들은 잽싸게 외국으로 자기 자식들을 보낸 뒤 도로 한국으로 들여와 ‘새치기’를 하며 ‘계급 대물림’을 하고 있죠. 이런 사회에 자유와 민주가 있나요?

이와 맞물려 살아남기 위한 경쟁이 쓰나미처럼 세상을 집어삼켰습니다. 수많은 서바이벌 프로그램들은 생존경쟁이 마치 자연스러운 것처럼 사람들을 홀리고 있죠. 개천에서 용이 나기는커녕 죄다 추어탕이 될 게 빤해진 사회에서 어이없게도 미꾸라지들은 최면에 걸린 것처럼 하나같이 부자가 되기를 욕망합니다. 어차피 한줌의 계층만이 싹쓸이하고 나머지는 빈털터리가 되는 판인데, 그 1%에 들어가겠다며 물불을 가리지 않고 있습니다. ‘평범한 서민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새벽부터 달밤까지 뛰어다니며 스스로 희망고문을 합니다.

이런 끔찍한 시대의 흐름보다 더 으스스한 것은 모조리 헉헉대면서도 아무도 이런 세상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은 채 달음박질친다는 점입니다. 자본주의 질서는 번영과 조화로부터 다져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악다구니, 숨 막히는 경쟁, 전쟁 같은 일상을 통해 튼튼해지고 있죠.
민주주의가 허울로 느껴지는 요새, 때마침 박정희 기념관이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열렸습니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곯은 상태인지 나타내는 크나큰 뾰루지죠. <아프니까 청춘이다> 따위의 알량한 위로를 아편 삼아 고통에 치이며 살아갈 게 아니라면 여의도 정치만 타박할 게 아니라 생활 속에서 새로운 민주주의를 상상하고 만들어내야 하지 않을까요?



 

저작권자 © 대학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