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교 / 광운대 동북아대학 교수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역사는 없다. 중국과 한반도를 둘러싼 미래의 역사 또한 마찬가지다. 정책입안자나 여론이 ‘중국이 한반도를 위협할 것’과 같은 가설을 믿는 순간 역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데이터로 존재하지 않는 신화나 믿음, 가설, 공포까지도 미래의 역사를 만드는 데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국익이라는 개념이 그렇듯 역사에서 객관주의란 으레 주류의 전망을 되뇌이고 그들의 이익을 대변한다. 이제 물어야 한다. 객관을 표방하며 주류가 묻지 않는 바로 그 질문, ‘우리는 중국과 어떤 역사를 만들어 가야 할 것인가’. 내일의 역사는 지금 여기 사는 사람들이 현재를 어떻게 인식하고 어떤 역사를 만들어 가고자 하느냐 하는 집단 심성에 큰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미국의 주류들은 중국의 미래에 대해 횡설수설한다. 어떤 자는 21세기적 중국 위협론에 기대어 중국이 동아시아를 위협할 것이라 전망하고, 어떤 자는 20세기적 중국 붕괴론의 연장선상에서 중국은 내부 모순에 의해 침몰할 것이라 예언한다. 한국의 주류는 연일 그것을 복제 재생산하고 있다. 메시지가 불분명한 것은 두 가지 목적에서이다. 잘 모르겠으면 그냥 침묵하고 있으라는 것. 아니면 ‘어쨌든 문제가 있다’고 외우라는 것. 그냥 미국에 계속 충성하라는 은근한 속삭임에 넘어가거나 ‘중국은 나쁘다’라고 외치면 된다. 주류의 목적은 그것이다. 

  이제 미국과 더불어 반 중국 전선을 형성하면 되는가. 이어도를 중국이 점령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강정마을에 해군기지를 건설하는 것이 정답인가. 맞다. 정답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만의 정답이다. 무기를 계속 팔아먹어야 하는 미국의 정답이고, 미국이 이 땅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야 득이 되는 이 땅의 주류들의 정답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땅에서 자손대대로 행복하게 살아야 할 우리의 정답은 결코 아니다.
행복의 제1조건은 생존권 확보이다. 20세기 내내 전쟁과 폭력의 소용돌이 속에 우리는 생존권을 빼앗겨왔다. 일년 전 연평도에서도 그랬다. 우선 생존권부터 챙겨야 한다. 그 중에서도 대한민국이 지난 반세기 동안 외쳐온 ‘안정’,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들의 안정 보장 약속을 믿을 수 없다. 무기 경쟁을 통한 안정은 넌센스임을 우리는 20세기 내내 목격했다. 안정을 보장하기 위해 다시 중국과 전선을 만들겠다는 뻔한 전략에 속지 말아야 한다.

  무엇부터 할 것인가. 우리는 전근대 시기의 모화사상을 대체할 근대적 중국관을 만들지 못하고 식민화됐다. 우선 신식민주의적 중국관에서 탈피해야 한다.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일본의 식민주의적 중국관과 미국의 신식민지적 중국관의 혼재 속에 빠져있다. 주류는 미국 중심의 세계관으로 중국을 본다. 중국 위협론을 수입해 중국을 경계해야 한다고 외친다. 그러나 정작 중국이 우리에게 위협적인 이유를 대기보다는 이데올로기적 공세만 무성하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미국보다 중국을 더 무서워하게 됐다. 강정 마을에 해군기지는 당연히 건설해야 하는 것으로 돼가고 있다. 주류는 동북공정이 북한을 점령하기 위한 중국의 사전정지작업이라고 떠들다가 그들의 소기의 목적-어떤 이는 한국의 친미겧北� 감정조성, 어떤 이는 벼슬자리-이 달성되자 이제 조용하다. 동북공정이 끝났는데 중국은 아직도 북한을 점령하지 않고 있다. 그 사이 다수가 다시 친미겧北像米� 돌아섰다.

  주류는 조공 체제 하의 중국과 한반도 관계를 근대 이후의 제국주의, 즉 식민지 관계보다 더 수탈적 관계로 규정한다. 2천 년 간 지속된 양국 간의 관계사 중에서 가장 극단적 마찰이 있었던 지점만을 편집해 드러낸다. 그런 방식으로 강력한 중국의 부상이 한반도에 위협적임을 강조한다. 그들에게는 한반도에서 중국과 결부된 전쟁이 “주류의 세계관의 바깥에 존재하는 국가나 민족을 우리가 타자화하는 순간 발생했다”는 이삼성 교수(한림대 정치행정학과)의 자기성찰 같은 것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미국적 세계관으로 중국을 타자화하면 할수록 중국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의 이익을 대변해줄 엘도라도로 변한다. 사람은 사라지고 돈과 땅만 남는다. 우리의 조선족에 대한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이미 조선족은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한 수단일 뿐이고, 언젠가 간도 지역을 빼앗기 위한 땅따먹기의 증인들일 뿐이다.

  주류의 주장대로 중국의 부상은 우리에게 위험의 신호일 수도 있다. 그러나 미국의 하부 체제로 편제돼 있는 신식민주의적, 동아시아적 질서를 넘어 설 기회이기도 하다. 한반도의 휴전 체제를 동북아 국가 간의 평화 체제로 바꾸는 일은 그 핵심에 있다. 미국이나 북한이 일방적으로 ‘전쟁과 폭력의 세기’를 연장하지 못하게 하는 새로운 힘이기도 하다. 실제로 6자 회담은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 경제적으로도 EU와 같이 다원적인 동북아 경제 체제 구축의 가능성이 열린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뼛속까지’ 친미 주의자들에게 휘둘려 한미 FTA라는 전근대적인 불평등한 경제 조약을 체결할 것이 아니라 다원적인 동북아공동체를 우선 만들어야 했다. 중국도 우리와 같이 불평등 조약으로 시작된 반식민지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때 만들어진 반식민주의적 저항기제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과는 적어도 국가간 불평등 조약은 맺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은 높다.

  중국 또한 또 하나의 패권주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아직 시간이 남아있다. 당분간 미국과 상호 견제가 이루어질 것이다. 위기이자 기회인 시기이다. 그 틈바구니에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항구적 생존권 확보에 나서야 한다. 중국을 활용해 남북한간 평화 체제와 다자적 동북아 안보 및 경제 체제를 구축하는 일이 급선무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시급히 필요한 것은 우리들의 주체적 중국 인식이다. ‘그들’이 아닌 ‘우리들’의 역사는 만들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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