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인공위성은 안보, 통신, 보건, 오락 등 우리의 생활 전반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핸드폰, 내비게이션, TV 등이 모두 인공위성의 영향 아래 작동하고 있으며, 기상관측이나 첩보 등도 인공위성에 의해 이뤄진다. 그러나 인공위성이 이토록 인류의 삶과 밀접해진 것은 50년이 채 되지 않았다.

인공위성을 비롯한 우주개발이 냉전 체제 당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은 이미 지난 지면에서 다룬 바 있다. 1957년,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가 소련에서 발사된 이후, 우주개발은 급속도로 진행됐다. 미국은 1958년 위성 익스플로러 1호를 발사해 소련을 따라잡았고, 소련은 1961년 ‘동방’이라는 뜻의 보스토크 1호를 발사하여 최초의 유인 우주비행을 성공시키며 다시 미국을 따돌렸다. 이때 여기에 탑승했던 이가 최초의 우주인으로 유명한 ‘유리 가가린’이다. 그가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보며 남긴 말인 “지구는 푸른 빛깔이었다”는 여전히 회자된다. 같은 해 미국의 대통령이 된 케네디는 ‘데스티네이션 문’에서 “60년대가 저물기 전에 반드시 인간을 달에 도달시키겠다”고 선언하며 우주개발의 의지를 불태웠고, 결국 1969년 7월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함으로써 다시 소련을 앞지르기도 했다. 이때 탑승했던 닐 암스트롱은 달에 처음으로 발을 내딛은 인간으로 역사에 남았다. 이처럼 우주개발의 역사는 인류 역사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됐다.

그러나 한편에선 이처럼 과열된 미·소 간의 우주개발 경쟁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우주개발은 그 성격 상 천문학적인 액수와 많은 고급 인력, 긴 시간 등이 요구되는 일이었기에 자국민들의 원성 또한 날이 갈수록 커졌던 것이다. 결국 계속되는 경제 불황과 냉전 체제의 종식 등을 기점으로 우주개발의 열기는 상당 부분 냉각되고, 대신 그 연구 방향은 더 실용적인 측면으로 선회했다. 우리가 오늘날 누리는 이와 같은 많은 혜택은 당시 우주개발 경쟁의 결과물인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하루가 멀다 하고 원자폭탄 및 수소폭탄의 투하실험이 벌어지던 당시의 일촉즉발의 분위기 속에서 양 진영의 관심이 다른 쪽으로 조금이나마 돌아갔다는 것은 그나마 평화적인 일이 아니었을까.
 
황인찬 편집위원|mirion1@naver.com

저작권자 © 대학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