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가은 / 영화감독


  장편 옴니버스 영화 <시선 너머>(감독 강이관·부지영·김대승·윤성현·신동일, 2010)는 국가 인권 위원회의 인권영화 프로젝트 ‘시선 시리즈’의 최근작으로, 각기 다른 색깔과 매력을 지닌 다섯 명의 영화감독들이 만든 단편 모음집이다. 이들 작품은 ‘시선 너머’에 존재하는 여러 인권 문제들에 대해 다양한 화두를 던진다.

  일상 속에 숨겨진 폭력의 시선에서부터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새롭게 생겨난 문제들에 이르기까지 이들 작품의 스펙트럼은 매우 다양하고 심도깊다. 이 중 김대승 감독의 <백문백답>은 직장 내 성폭력 문제와 정보 인권 문제를 정면으로 파고들어 조명한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백문백답> (감독 김대승, 2010)
                         <백문백답> (감독 김대승, 2010)

  젊고 열정적인 디자이너 희주(김현주)는 술자리에서 회사 팀장인 상규(김진근)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희주는 용기 내어 상규를 고소하지만, 그의 모략으로 경찰은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그녀의 신상 정보에 주력하게 된다. 대학 시절의 집시법 위반 사실에서부터 우울증 치료 병력, 현재의 신용 정보와 사내 CCTV 화면에 이르기까지 보호받아 마땅할 희주의 개인 정보들은 그녀의 동의 없이 유출된다.여기에 성범죄 피해여성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한몫 더해진다. 

  영화 내내 그녀의 사생활을 힐난하듯 캐묻는 경찰의 목소리가 보이스오버로 흐르는데, 그 질문들 속에서 ‘여성에게도 원인 제공의 잘못이 있지 않은가’라고 추궁하는 사회적 편견을 읽어낼 수 있다. 소문에 쉽게 흔들리는 직장 동료들은 같은 계급적 약자임에도 불구하고 지지보단 반감을 앞세운다.

  그렇게 남성중심의 권위주의 사회에서 원초적 폭력 앞에 무너졌던 희주는, 용기 내어 일어서자마자 사회적 약자로서의 위치를 재확인하며 다시 주저앉게 된다. 결국 그녀는 현실적 한계와 부담에 가로막혀 가해자에 대한 고소를 취하하고 회사를 그만둔다. 

  감독은 그 허무하고 씁쓸한 결말에 그 어떤 놀라운 복수의 반전이나 희망의 판타지도 허락하지 않는다. 이게 바로 우리의 현실이라고, 이 부정과 불합리로 가득한 세계 안에서 당신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나갈 것이냐고 되물으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영화는 막 사고를 당한 희주가 비틀거리며 올라탄 엘리베이터의 CCTV 장면으로 시작해 그녀가 떠난 뒤 회사 복도를 오가는 사원들을 비추는 CCTV 화면으로 끝난다. 영화 내내 그녀의 삶을 통제하듯 지켜보던 위협적인 카메라가 사실 모두의 뒤를 따라붙고 있었음을 깨닫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러한 숨겨진 감시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이는 아무도 없어 보인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감시자가 누구인지도 불명확한 시선의 폭력을 견뎌내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저작권자 © 대학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