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혜영 / 문화연구학과 석사과정


  느닷없이 쏟아진 우박에 얻어맞은 탓인지, 시월이 피멍처럼 물들어가고 있다. 어수선한 세상 속에서 검붉게 농성 중인 단풍을 심난하게 바라보노라니, 한갓진 독서의 계절이 부쩍 아쉬워진다. 우수어린 안타까움에 겨워, 피로한 시선으로 잠시 책장을 더듬어본다. 올해 초 타이완에서 사들고 온 수십 권의 책. 지난 봄에는 새싹처럼 싱그럽던 신간 서적이다. 하지만 귀국 이후 바쁘다는 핑계로 한동안 까맣게 잊고 살았다. 그렇게 내버려둔 책들이 급기야 얻어터진 가을처럼 아우성치기 시작한다. 더는 못 기다리노라고, 이제는 일독을 바라노라고, 천고마비의 계절에 살찐 말이 뒷발길질하듯이 나를 자극한다. 하는 수 없이 애정결핍에 날뛰는 천리마를 위로하는 심정으로, 책들을 한 권씩 쓰다듬어 본다. 청핀서점(誠品書店, 이하 청핀)이 힘차게 내딛는 인문의 혈기가 책갈피마다 세차게 약동한다. 갑자기 강렬한 향수처럼 청핀에서 밤새도록 활개 치던 행복한 추억이 왈칵 솟구친다. 어느새 코끝이 시큰해진다.
 
  연초에 잠깐이었지만, 출근 출석 다 무시하고 아무 잡념 없이 오로지 책과 실컷 만나는 사치를, 나는 타이베이에서 한껏 누렸다. 그런 호사를 선물해준 청핀의 서해(書海)는 진정 어머니 뱃속의 양수와도 같았고, 나는 책의 바다에서 마음껏 헤엄치는 태아였다. 가을이라 그런가. 퇴행이라 해도 좋으니, 어미의 뱃속으로 다시 기어들어가고 싶은 미숙아처럼, 나는 진심으로 그 광대무변한 책의 물살에 또 한 번 온몸을 내맡기고 싶다. 아, 청핀!

  만약 가장 훌륭한 서점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없이 청핀을 손꼽으련다. 7천 여 평에 8층 빌딩이라는 규모도 물론이지만, 청핀의 독자성은 특별한 경영이념에 기반한다. ‘타이완의 으뜸가는 미치광이’로 불리는 설립자 우칭여우(吳淸友)는 “망하는 그 날까지, 함께 누리는 문화활동을 하겠다”며, 연중무휴 24시간 서점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다. 독자라면 누구나, 구입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서적을 온종일 얼마든지 무료로 볼 수 있다. 독서뿐 아니라 다양한 문화활동이 항상 풍성하다. 이 정도면 이윤을 초월하는 사상이라 해도 손색없지 않을까. 타이완의 문화는 바로 이 청핀에서 태동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따금 사람들이 묻는다. 왜 타이완 문화연구에 관심을 가졌냐고. 지금은 이 질문에 “청핀서점”, 딱 한마디로만 답하련다. 우칭여우는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모두 각자 반드시 완성해야할 공부(숙제)가 있다. 그 공부를 도와주는 곳이 바로 청핀이다.” 라고 말하는데, 나는 그의 철학을 산소통 삼아, 인생 고해 속에서 완성해야 할 공부를 청핀에서 자맥질하며 연마하기를 바라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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