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강현 / 제주대 석좌교수

 
 

  세계화(미국화)는 양면성을 지닌다. 이는 음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세계화는 획일적 문화의 보편화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각 민족 특유의 문화 예술, 먹거리 등이 인기를 얻게 되는 양면성도 지닌다. 에스닉 붐으로  토속문화의 상품적 변별성이 나타나거나 느닷없이 복고풍이 되살아나는 측면도 있다. 세계화는 세계 문화를 필연적으로 팬아메리카 문화권으로 단일화시키면서, 동시에 각개 ‘에스닉’을 차별 상품화시키는 결과를 빚는 탓이다. 고유성을 간직하되, 전통적 의미에서의 고유성이 아니라 자본주의 국제거래품명으로서의 에스닉으로 새롭게 부각될 수 있는 계기를 맞고 있다.

  세계 문화의 꽃밭은 백화가 만발한 꽃밭이다. 단일 빛깔의 꽃으로 이루어진 꽃밭은 평화의 꽃밭이 아니다. 미국을 위시한 ‘세계 문화의 종주국’은 단일 꽃밭을 세계문화의 꽃밭이라고 억지 부리고 있으며, 심지어 다른 꽃밭을 짓밟는 횡포를 부리기도 한다. 그런 가운데도 에스닉의 상품화 문제 때문에 고유문화는 강력한 상품으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전통과 진정한 잡종문화

  잡종의 힘은 강하다. 나는 우리 문화를 강하게 만드는 지름길이 잡종화임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우리 문화의 법고창신을 통하여 새롭게 창조되는 잡종은 단순한 잡종이 아니다. 새로운 문화 창조다. 우리 문화가 지니는 잘못 중의 하나는 역시 획일화다. 가뜩이나 좁은 국토가 획일화로 치닫고 있다. 그런 면에서도 잡종은 필요하다. 홍성욱이 말하는 바, 잡종의 ‘창조적 존재학’을 인정하는 탓이다. 진정한 잡종은 혼성모방과는 다르다. 잡종은 대등한 관계로 만나야하며 유전인자를 이어받고는 있되 전혀 별개의 창조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혼성모방은 아리랑 드레스처럼 단순히 혼재된 경우로 참신한 창조력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강한 잡종은 전통과 공존한다. 전통이 온전하게 보존되면서 새롭게 법고창신하는 가운데 강한 잡종도 생겨나며, 지역 문화가 살아있을 때 중앙 문화도 더불어 사는 것이며, 민족 문화가 사는 가운데 세계 문화의 백화가 만발한 꽃밭도 가능한 것이다. 우리 문화에도 역사적으로 볼 때 토박이문화와 들여온 문화의 융합으로 만들어진 잡종이 수두룩하다.

  우리 음식 문화의 많은 부분은 유목민족과 농경민족 문화의 충돌과 융합 속에서 발전해왔다. 불교 문화는 중국을 통하여 들어온 신앙과 토착적 무속신앙의 합작품으로 빚어진 결과물이다. 탈춤의 사자춤은 분명 서역에 널리 퍼져있던 가무희로서 중국을 통하여 수입됐을 가능성이 높다. 꼭두각시극도 남송의 괴뢰희와 연관성이 엿보인다. 조선후기 정조시대에 건설된 수원 화성의 벽돌축성은 청나라의 벽돌축성에서 영향 받은 바 있다. 조선후기에 수입된 고추는 고추장 문화를 일으켰으며, 김치와 결합하여 가히 매운 김치의 혁명을 일으켰다. 고추로 담근 김치는 당시대의 김치 주류에서 보면 분명한 잡종이다. 정당한 문화적 충격은 문화발전의 원동력이며, 그렇게 하여 만들어진 잡종은 이미 잡종이 아니다. 어쩌면 21세기를 눈앞에 둔 지금도 그런 변화의 예고는 끊임없이 존재한다. 서구 문화의 유입과 그에 따른 생활양식의 변화는 근래 쌀밥보다 피자를 즐기는 우리네 모습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 문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잡종과 마구잡이 혼성을 혼돈하고 있다. 진정한 잡종은 역동성과 창조력을 지니면서 계속 전승이 거듭되지만 혼성모방은 단명으로 끝날 뿐이다. 진정한 잡종은 결합하는 양자의 문화적 유전자가 어느 정도는 동등할 때 창조된다. 서구 문화와 동양 문화의 문화 접변은 만만한 과제가 아니다. 들어온 문화의 유전인자가 절대적인 가운데 이루어지는 결합은 오로지 혼성모방일 뿐이다. 디지털문화혁명은 붓과 물감으로 만들어지던 미술품을 컴퓨터로 대체하고 대량 생산의 유통혁명을 촉발하고 있다. 컴퓨터를 통한 혼성모방은 급격한 문화변동을 촉발하고 있으며, 붓과 물감의 영성을 어떻게 담보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야기한다. 과연 혼성모방의 문제가 저작권 차원에서만 논의될 수준인가.       

  진정한 전통이 존재하는 가운데 원하는 잡종문화도 생산될 수 있으리라. 진정한 전통, 진정한 잡종도 없는 가운데 오로지 제1세계의 혼성문화만이 번창하는 20세기 말의 풍경을 우리는 오늘도 아무 생각 없이 거닐고 있는 것이 아닐까. 진정한 전통과 진정한 잡종 문화를 위해서라도 우리 문화가 중심에 서야한다.

슈퍼 콤플렉스 떨쳐내기 

  우리는 지난 100여 년 간 큰 것 콤플렉스에 시달려왔다. 우리 문화의 원형은 본디 작은 것이었다. 외국에 비하여 낮고 굽이진 산줄기, 산을 에워 도는 강줄기를 배경으로 안성맞춤인 건물이 들어섰다. 그러나 어느 결에 ‘동양 최대 불상’, ‘세계 최대 불상’하는 식으로 수식어 ‘최대’가 붙지 않으면 성에 차지 않는 문화로 급변했다. 모델이 등장해도 슈퍼 모델이어야 하고, 감자도 슈퍼감자, 토마토도 슈퍼 토마토다. 자그마한 구멍가게에도 슈퍼마켓이란 간판이 걸리고, ‘슈퍼’마저도 부족하여 울트라, 초극, 최상극 따위의 용량을 극대화란 ‘지상 최대의 쇼’가 연일 벌어진다. 왜 큰 것만 찾는 것일까.

  첫째, 큰 것이 좋다는 생각은 사대주의적 발상이다. 미인의 기준도 오로지 날씬함과 큰 키를 통해서 결정된다. 아무리 예뻐도 키가 작으면 실격이다. 그러나 어쩌랴. 사람이 키가 크고 작음은 후천적인 영양섭취와 밀접한 것은 사실이나 선천성을 무시할 수 없다. 얼굴도 흰 것이 미인이며, 가능한한 백인의 얼굴을 닮고 싶어한다. 프란츠 파농의 진술대로 ‘백인의 가면을 쓴 흑인’이 성행한다. 영화에서 본 듯한 ‘제임스 딘’이 길을 물으면 친절하게 가르쳐주는 사람도 황인종이 길을 물으면 불친절해진다. 백인에 대한 경도는 백인문화에 대한 경도로 나타나고 있으며, 반대로 제3세계 민중들에 대한 불필요한 차별로 나타난다. 얼마나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우리나라에서 박해를 받고 울면서 쫓겨 가고 있는가를 생각해보자.

  둘째, 큰 것만이 좋다는 생각은 신자유주의적 발상이다. 큰 것에의 경도는 자본의 효율성과 생산성에서 비롯된다. 작은 것은 상품가치가 없다. 유전인자를 조작한 슈퍼콩이 세계를 엄습한다. 건강문제가 전혀 입증되지 않은 슈퍼콩이 일으킬 문제는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다. 작지만 이 땅에서 알맞게 살아온 오랜 토종들이 생산량이 높은 수입종으로 교체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토종이 더 맛있고 건강에도 좋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생산량이 많은 수입종은 토종에 비하며 값이 싸다. 값이 싸기 때문에 시장을 휩쓴다. 토종은 자신의 땅을 거의 상실했다.

  20세기 한반도의 문화지형도는 하드웨어 중심의 문화였다. 우리 문화는 하드웨어에만 치우쳐왔다. 1960년대 이래로 현충사를 위시하여 전국에서 새롭게 복원된 건물에 가보면 내용물이 빠져있는 건축 군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된다. 비슷비슷한 규모로 불도저로 밀어서 주차장을 만들고, 매표소가 있고, 거대한 건축물이 나타나고, 학계의 새로운 연구업적을 뒤따라가지 못하는 낡은 전시물이 있다. 지극히 관변적인 조각물이 서있거나 육중한 돌에 관행적인 글귀로 대통령의 못 쓰는 글씨로 휘호를 아로새긴 대리석을 세워두었거나, 돌과 나무를 적절하게 배치하고 인공 연못을 판 일본식 정원이 서있거나, 그리하여 한번 와본 사람은 다시는 오지 않거나 올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하드웨어만이 서있을 뿐이다.

  21세기 우리 문화는 내용물 중심으로 이전해야 한다. 할리우드 애니메이션의 소재를 보면 <뮬란>이나 <이집트 왕자> 같은 이야기가 두루 활용된다. 우리 영화가 외국으로 적극적으로 진출하려면 할리우드 영화의 재판으로는 안 된다. 우리의 소재와 주제를 가지고 승부를 내야한다. 기술과 자본의 힘이 중요하나 별도로 소프트웨어가 필요하다. <서사무가>나 <바리데기>, <고주몽 신화> 만을 가지고도 세계적인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도 있다. 전 세계적으로 침투한 가공할 만한 콜라의 벽을 허문 게 바로 가장 한국적인 식혜였지 않은가! 이제 소프트웨어는 하나의 문화 자본이 된지 오래다. 우리문화의 광맥인 소프트웨어를 가동시켜 문화 전체의 하드웨어를 움직여나갈 사고의 전환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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