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태섭 / KBS 전 이사


  2011년 6월 23일 민주당 당대표실에서 문방위원·최고위원  연석회의가 열렸다. 수신료 인상안의 국회승인에 대한 당의 입장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다음날, 한나라당 한선교 의원이 그 자리에서의 발언 내용을 생생한 구어체로 담은 문건을 흔들어대며, 빨리 승인하라고 민주당을 압박했다. 이른바 KBS의 민주당 도청사건이다. 이 사건은 검찰로 넘어갔는데, 흡사 블랙홀에 빨려든 것 같다. 사안 자체가 명쾌하고 증좌도 뚜렷한데, 야당을 수사할 때는 그토록 유능하던 검찰이 이렇게 바보먹통일 수 없다.

  공당에 대한 도청은 미국에서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현직 대통령이 물러날 정도로 심각한 범죄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김인규 사장이 추진한 수신료 천 원 인상안은 일단 물 건너간 듯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으로서 포기하고 싶어도 포기할 수 없는, 운명과 같은 일이기 때문이다.

  KBS 수신료 인상에 관한 정치권의 입장은 정권에 따라, 여당이냐 야당이냐에 따라 결정되어 왔다. 박재완 장관은 2008년 8월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KBS는 정부 산하기관, 사장은 대통령의 국정철학과 정책기조를 구현할 인물이어야 한다.”는 발언을 했다. 
 
  이 발언은 정권의 KBS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민주주의를 간판에 건 이상 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되는 말이었다. MB정부는 방송장악으로 그치지 않았다. 조·중·동 보수언론이 주도하는 거대 종편을 도입해 기득권층의 방송지배를 확립하는 데까지 나아간 것이다. 여론지배력이 큰 기존의 신문사가 종합편성이나 보도 분야에 진입하지 못하도록 하는 게 민주국가의 상식이다. 이는 여론다양성을 지키기 위해서다. MB정부는 그 상식을 보기 좋게 깔아뭉갰다.
 
  현 정권 출범과 함께 취임한 김인규 사장 또한 KBS 수신료 인상을 내걸었다. 그런데 이번 수신료 인상에는 정권의 공영방송 길들이기 외에도 다른 이유가 묘하게 겹쳐진다.

  금년 말 방송을 시작할 조·중·동·매 종편이 안착하기 위해선 연간 2조 원의 운영비가 필요하다. 2010년 우리나라 광고시장의 규모는 총 8조 4천억 원이다. MB정부가 KBS 수신료 인상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이 2조 원 때문이다. 간접광고·중간광고·총량제 등을 도입·확대하고, 종편에 황금채널을 부여하고, 케이블TV사가 종편을 의무적으로 재송신하도록 강제하고, 종편에 대해 직접 광고영업을 허용하는 등 종편에 대한 온갖 특혜를 추진하는 것도 이 2조 원 때문이다.

  2010년 1월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은 “수신료를 5000-6000원으로 인상하겠다,”면서 “KBS가 수신료를 인상하면 7000-8000억 원 규모의 광고가 민간시장으로 이전되는 효과를 낼 것”이라고 말했다.

  수신료를 올려 KBS의 광고를 폐지하고, 그 만큼의 금액이 종편의 먹거리로 흘러들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국민들이 수신료를 내는 것은 KBS가 정치적 독립성을 확보하고, 사회 각계 각층의 다양한 목소리를 전달해 민주적 여론형성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종편 먹거리 마련을 위한 수신료 인상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2010년 11월 19일 KBS이사회는 ‘광고 축소 없는 수신료 3500원 인상안’을 의결했다. 직후 조선일보는 11월 22일자 사설에서 “국민에게 수신료를 더 요구하려면 광고를 어떻게 줄이고 없앨 것인지 구체적인 일정부터 밝혀야 한다”며 광고 축소를 요구했다. 중앙일보도 사설에서 KBS의 광고유지 방침을 성토했다. 동아일보 사설 또한 “광고를 단계적으로 완전히 없애는 안”을 내놓으라고 주문했다. 이후 방통위는 KBS 광고수입을 대폭 줄이라는 검토의견을 첨부해 수신료 인상안을 국회에 넘겼다. 그리고 한나라당이 광고축소를 전제로 승인하려는 시점에 도청사건이 터졌다.

  수신료 인상액이 종편 종잣돈으로 유용되는 것보다 심각한 문제는 KBS가 수신료 인상은커녕 수신료를 받을 자격조차 상실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 정부는 시작부터 방송을 장악하고 자신의 홍보도구로 전락시켰다. 정권의 KBS 장악은 불법 부당한 이사회 장악과 사장 교체, 정권의 KBS 장악에 비판적인 KBS 사원들에 대한 대량징계, <미디어포커스>, <시사투나잇> 등 권력에 대한 감시를 수행하던 시사프로그램의 폐지, 관료주의적 통제체제의 부활, 정권홍보성 뉴스와 기득권층을 일방 옹호하는 프로그램의 확대 순으로 진행됐다.

  오늘날 KBS의 왜곡·편파 방송은 ‘정권의 시녀’였고 ‘국민의 기만자’였던 과거 5공화국 시절을 무색케 한다. KBS에는 정부권력과 대기업 등 기득권의 목소리만 울려 퍼지고 있다. 참여와 협의의 민주적 거버넌스가 실종되고, 정치권력과 재벌 광고주의 야합에 의한 반민주적 방송지배가 확대되고 있다.

  현재 KBS 수신료는 정당성이 결여돼 있다. 수신료의 본질은 공영방송이 독립성을 누리며 공적 책무를 완수하도록 보장하는 핵심장치다. 공영방송이 본연의 책무를 수행하지 못할 경우 수신료 납부의 정당성도 함께 훼손된다.
  
  KBS는 수신료 인상 이전에 그 자체가 정상화돼야 한다. 정권에 의한 그간의 방송장악, 비판적 기자·PD·진행자·출연자 축출, 비판적 프로그램 폐지, 정권홍보에 올인 등 그간의 잘못을 바로잡는 것이 선행돼야만 하는 상황이다. 또한 수신료제도 자체에 대한 근본적 개선도 필요하다. 정권홍보 방송으로 전락한 KBS의 정상화, 수신료제도 개선, KBS의 가치와 철학을 쇄신하기 위한 사회적 토론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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