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공회 / 국민대 강사

  하버드 경제학자 맨큐의 <경제학 원리>(1997)는 현재 세계적으로 가장 잘 팔리는 경제학 교과서로, 지금까지 5번의 개정을 거치며 경제학 교육의 표준으로 자리 잡고 있다.

  저자가 제목에 ‘원리’라는 단어를 넣은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리카도, 밀, 마샬을 관통하는 ‘권위’의 상징이었지만 20세기 들어서는 그 어떤 주요한 교과서 저자도 쓰기를 주저했던 일종의 ‘금기어’였기 때문이다. 그가 위 책에서 내놓은 ‘경제학의 열 가지 기본 원리’는 이제 크리스트교의 ‘십계명’과 같은 권위로 자리를 잡아, 경제학의 신봉자든 비판자든 누구라도 참조하지 않으면 안 될 중요한 가이드라인이 되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경제학도들이 금과옥조처럼 떠받드는 맨큐의 ‘원리’는 그의 선배들이 내놓았던 것들과는 사뭇 다르다. 리카도나 밀에게 가장 중요한 원리는 자본주의 경제에서 물질적 부, 즉 가치의 본질·크기 및 생산·분배에 관한 것이었으며, 이를 적절히 다루기 위해 경제학은 필연적으로 역사와 사회, 그리고 그 안에서 인간들이 상호작용하는 다양한 방식들을 두루 참조해야 했다. 반면 그런 원리들은 맨큐의 십계명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그것은 대체로 ‘모든 선택엔 대가가 따른다’, ‘교환은 교환당사자들을 이롭게 한다’ 따위의 인간의 사고와 행동 일반에 관한 매우 추상적인 성격의 명제들로 채워져 있다. 과연 이런 것들을 ‘경제학의 기본 원리’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들은 우리가 경제를 이해하는 데, 하다못해 주식시장에서 돈을 버는 데 어떤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현재 이런 질문들은 ‘경제학 제국주의’라는 표제 아래 가장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다. 이는 현실의 제국주의와 같이 경제학이 여타 사회과학의 고유영역들을 침범하고 나아가 자신의 식민지로 삼는 것을 일컫는다. 이를 통해 경제학은 그 영역을 넓혀나갈 뿐 아니라 사회과학 전체를 아우르는 하나의 ‘제국’ 건설을 꾀한다.

  경제학의 궁극적인 관심은 근대사회의 물적 동향을 밝히고, 나아가 ‘정치가나 입법자’에게 통치와 관련된 지식을 제공하는 데 있었다. 마르크스가 근대적인 과학적 경제학의 선구자로 꼽았던 페티 이래 로크, 흄, 스미스, 리카도, 밀 등은 모두 이런 의미에서의 ‘경제학’을 하고 있었다. 이들이 경제학자보다는 역사가나 철학자, 또는 포괄적 의미의 사상가로서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면 이는 경제학이 원래 어떠했는가를 알려주는 것일 따름이다.

  그리하여 경제학은 사회의 특정한 문제에 집중하면서도 자신의 대상인 근대 자본주의경제를 제대로 다루기 위해 그 역사와 지리적 불균등 발전에 관한 이용 가능한 모든 자료를 참조했고 온갖 사회적 결정인자들을 고려했다. 그러나 경제학이 당시 막 태동하던 여러 사회과학들의 성과를 존중심을 가지고 참조하기는 했어도 다른 사회과학들의 고유영역을 침해하진 않았다.

  따라서 사태를 반전시켜 경제학이 제국주의적으로 탈바꿈하는 데는 일정한 계기가 필요했다. 최근 파인과 밀로나키스는 그들의 저서 <경제학 제국주의에서 괴짜경제학으로>(2009)에서 ‘축소에서 팽창으로’라는 모토로 적절히 요약한 바 있다.

  사회가 복잡해짐에 따라 경제학이 다룰 문제도 늘어났지만, 동시에 경제학을 연역적 방법론과 현실의 추상을 통한 모형화에 입각한 하나의 ‘과학’으로 정립시키려는 시도도 진행됐다. 이 과정에서 경제학이 역사적·사회적 관심을 점차 내려놓은 것은 차라리 자연스러웠으며, 이런 움직임은 1870년대 ‘한계혁명’에서 정점에 달한다. 이제 사회적 생산과 분배에 상이하게 참여하는 인간 집단들을 칭했던 ‘계급’은 ‘최적화하는 개인’으로 대체되고, 여러 역사적·사회적 요인들에 의해 복잡하게 규정된다고 여겨졌던 ‘경제’는 ‘수요와 공급이라는 상반되는 힘으로 구성되는 시장’으로 축소된다.

  물론 이런 재편 과정은 많은 반대와 유보 조항들을 낳기도 했지만, 마침내 1930년대에 이르면 하이에크의 런던정경대 동료 로빈스는 “경제학이란 인간행동을 목적과 다양한 용처가 있는 희소한 수단 사이의 관계로서 연구하는 학문이다”라는 선언을 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정의 아래, 이제 경제학의 고전적인 주제들은 여러 응용분야로 밀려난다.

  그러나 일단 경제학이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방식으로, 그리하여 매우 제한적으로 정의된 이상, 그 응용분야가 경제학의 전통적 영역에 한정될 필요는 없었다. 즉 역설적이게도 경제학을 최소한도로 축소시키는 노력으로부터 ‘팽창주의’의 싹이 생겨난 것이다. 이제 ‘선택’이 있는 곳엔 늘 ‘경제학’이 있으며, 일상의 그 어떤 사소한 행위들도 ‘경제학적으로’ 설명해내는 것이 경제학의 본령이라는 듯한 분위기가 팽배해진다. 

  결국 맨큐의 십계명은 이와 같은 경제학의 변천사의 산물이다. 그것이 일러주는 대로 만약 경제학이 ‘선택’과 ‘교환’에 관한 학문이라면, 과연 그 범위를 벗어날 수 있는 사회적 이슈가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인간들이 창출하는 모든 사회적 관계들을 ‘선택’과 ‘교환’의 문제로 환원했을 때, 우리는 현대사회에서 인간의 사회적 삶에 대해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다시 말해 경제학이 사회과학에서 하나의 제국을 건설했다면, 그것은 우리가 사회과학에 대해 기대하는 모든 실질적 내용을 파괴함으로써만 가능했던 셈이다. 물론 이는 경제학 그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게 오늘날 범지구적 경제위기를 설명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데 경제학이 무능한 근원적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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