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우 / 사회학과 박사과정

<중동은 불타고 있다>, 유달승 저, 나무와 숲, 2011
 

 
 

이집트에서의 SNS 혁명하의 이집트 시민들이 SNS라는 문명의 이기에 도움을 받아 독재자를 몰아내고 민주주의를 이룩하고자 한 혁명? 언론들이 전달하는 수많은 기사 내용과 이름 붙이기를 들어보건대, 그러려니 하고 있는 이들도 적지 않겠다. 하지만 <중동은 불타고 있다>의 저자 유달승 교수는 이 일방적인 이름 붙이기를 겨냥한다. ‘SNS 혁명’이라는 이 이름의 생산과정과 그 의도를 폭로하는 것이 이 책의 중요한 목적 중 하나다.

이집트 혁명에 대해 SNS 혁명이라 이름을 붙이는 것이 적절하다고 할 수 있을까. 저자의 논점들을 이용해 일단 몇 가지만 짚어보자.

첫째, 이집트 인구 중 20%만이 인터넷을 사용하고, 44%가 문맹 혹은 반 문맹 상태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까?

둘째, 중동에서도 영국,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물가 상승, 실업난과 같은 것이 저항의 기초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영국과 이스라엘에서도 폭력적 경찰, 독점재벌의 독재에 대한 비판이 중요한 계기가 되어 SNS가 시위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중동에서의 혁명은 SNS 혁명이고 영국 및 이스라엘에서의 시위는 물가 폭동인 이유는 무엇인가?

셋째, SNS 혁명이라는 규정은 이집트 국민들이 요구했던 내용, 그리고 그 요구를 특정한 방식으로 해석하게 해주는 시공간적 맥락을 충분히 드러낼 수 있는가.

이집트 혁명의 현실을 해석하는 차원이건 그 의미를 드러내는 차원이건 간에 이 질문들은 중요하다. 하지만 아무래도 SNS 혁명이라는 이름은 답변이 되기에는 역부족이다. 사실 더 중요한 것은 이 문제가 단순히 설명력의 빈곤함을 드러내는 것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러한 규정은 ‘SNS’를 비롯한 서구 문명의 영향으로 이집트 사회가 변화된 것이라 주장하고자 하는 서구 언론의 정치적 의도가 만들어낸 해석이며, 무바라크 친미정권 몰락으로 표방되던 미국의 대중동 정책 실패를 다른 문제로 전환시키기 위한 정치적 기획이다. 그리고 그 내용을 ‘한국 언론이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결과, ‘이집트 혁명 = SNS 혁명’이라는 등식이 성립하게 된 것이다.

언제나 ‘이름 붙이기’는 정치적이다. 복잡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실을 어떤 하나의 이름, 하나의 개념으로 잘라내어 고정시키는 것은 그 자체로 붙여진 이름 외의 나머지 현실의 사상들을 감추고 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구나 그 이름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순간 현실에 대한 다른 접근 통로는 봉쇄된다. 이런 점에서 이집트의 현실을 다른 차원에서 보게 해준 저자의 시도는 강요된 무지와 은폐된 지배관계를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하나의 탈출구 같은 것일 수 있겠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저자 역시 이집트 혁명에 대해 ‘이집트 국민들의 힘을 보여준 혁명’이라는 다소 손쉬운 성격규정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보다 적극적인 해석과 규정이 필요하다. 저자 스스로가 지적하듯이, 중동은 신자유주의 속 지구적 자원 순환체계에서 하위 파트너 역할을 강요당하고 있다. 이슬람 교리들은 친미 혹은 반미의 논리로 변형되면서 현실의 상황과 점점 더 괴리돼 갔다.

반면, 현실의 살림살이는 전제군주를 정점으로 하는 임의적이고 불균등한 배분에 강하게 귀속돼 갔다.

만약 지구적 순환 자체가 그 불안정성을 본격적으로 드러낸다면 어떻게 될까. 중동과 같은 하위 위계 집단에게는 이전보다 큰 압력이 가해질 것이 자명한데, 이때 중동 세계가 스스로의 국제적 위치를 재정립하고 분열된 중동세계를 통합해가는 역량을 갖추고 있을 것인가. 시민들의 힘에 대해 찬탄하기 이전에 당면한 조건과 맥락을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압제에 저항한 민주주의로 표현되건, 종파적, 민족적 대립으로 드러나건, 이집트와 중동에서의 혁명은 지구적 자원순환체계의 시효만료를 알리는 알람이자 새로운 통합원리의 긴급성을 요청하는 격서로 규정해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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