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유라 / 서양화학과 석사과정


  오늘날 중국현대미술은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유학 온 1년 사이 중국현대미술에 관련된 크고 작은 전시들과 연구토론회가 서울 곳곳에서 심심찮게 펼쳐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한국의 미술계도 중국현대미술에 각별한 관심을 보이고 있음이 분명하다.
  가끔씩 지인들이 나에게 중국미술의 동향에 관해 묻곤 하는데 그때마다 난 미지근한 태도를 보였던 것 같다. 까닭을 생각해보면 요즘 국제적으로 높은 주가를 올리고 있는 중국작가들 대부분의 작품에서 별다른 감흥을 느끼기 못했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탁월하다는지, 평론에 소개된 것처럼 무슨 그렇게도 많은 철학적 성찰이 담겨있는지 알 수가 없다. 내가 구닥다리 심미관이나 편협한 시각을 가지고 있어서 그럴 수도 있다. 그렇다면 또 하나 궁금한 점은 왜 그들은 죄다 국외에서 먼저 인정 받고난 뒤 귀국하여 상전대접을 받는가 하는 점이다. 중국미술계는 그들을 알아볼만한 감식안이 그렇게도 없을까, 오로지 서구인의 ‘혜안’을 통해 필터링 된 결과와 표본으로 자신의 변별력을 키워야만 하는 것일까?
예술에 대한 이해는 관념형태의 절대적인 제약을 받는다. 서구의 현대미술은 피할 수 없는 본연의 관념체계를 기반으로 자생해오면서 오늘날의 형태를 갖췄다. 반면 사회주의 리얼리즘만을 옹호하다가 갑자기 아방가르드 예술을 수용한 오늘날의 중국현대미술은 상당부분 서구의 것을 그대로 급하게 흡입한 결과물로, 새로운 관념을 제공하기에 역부족이다. 때문에 그들은 서구에서 제공받은 관념(혹 아이디어)으로 창작한다. 그들은 인력을 제공할 뿐이다. 다른 말로 하면 ‘위탁가공’인 셈이다. 오늘날 중국의 많은 예술가들이 ‘국제무대’의 티켓을 받아 쥐었다. 하지만 그것은 서구의 수요이자 서구의 선택이다. 또한 이것은 중국현대예술이 더욱더 서구인의 입맛에 맞춰졌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예술가가 주목하는 창작의 대상들은 예술가 본인의 실존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는 동시에 작가가 처한 현실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예술가를 둘러싼 환경이 기본적인 조건(체계적인 운영기구, 개방된 창작 분위기, 건전한 시장, 사회계층의 지지 등)을 구비했다면 예술이 자생 발전하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다.
자신이 뿌리 둔 토양으로부터 제공받는 자양분 없이 예술은 자생적인 발전을 할 수가 없다. 만약 자체적인 건설체계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발전의 메커니즘을 구축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본질에서부터 자기갱신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이 형성되지 않는다면 중국현대예술은 영원히 ‘레스토랑 식탁 위의 만두’ 신세요, 영원히 <서양현대미술사> 속의 ‘중국파트’신세를 면치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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