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주현 / 전 경희대 강사

  밴쿠버로 떠나기 전, 나는 먼저 도착해 지내고 있는 친구에게 그곳에 대해 물어봤다. 캐나다의 물가가 비싸다고 해서 걱정이 됐기 때문이다. 친구는 한국보다 대체로 비싸지만 소고기나 야채는 한국보다 싼 편이라고 말했다. 나는 캐나다에서 생활하는 동안 고기만 먹게 될 줄 알았다. 그러나 생활이 익숙해진 지금은 오히려 한국에서 못 먹던 야채를 원없이 먹으며 지낸다는 생각이 든다. 육식 위주의 식습관이 발달한 서구인의 나라에서 나는 야채 위주의 식사를 하면서 살고 있다.

  알다시피 캐나다는 멕시코와 함께 미국과 인접해 있는 나라이다. 그로 인해 미국의 강한 영향을 받는 나라이기도 하다. 캐나다는 지난 1989년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맺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1994년에는 이것을 멕시코까지 포함하는 북미자유협정으로 확대시켰다. 이는 단순한 경제적 측면의 협력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캐나다와 멕시코는 사회적,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미국의 영향을 받았다. 대표적인 예가 패스트푸드로 대표되는 육식 위주의 미국식 식생활이다. 미국과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문화적으로도 차이가 분명한 멕시코지만 식생활에 있어 미국에게서 받은 영향은 매우 크다. 현재 미국 농산물의 유입으로 멕시코의 대표적 작물인 옥수수는 고사지경이 됐다. 학교에는 설탕이 잔뜩 들어있는 미국 유명 음료 회사의 자판기가 들어와 있으며, 현재 멕시코의 아동 비만률은 미국보다 높은 50%에 육박한다. 미국 사람들은 멕시코 음식을 먹는데 멕시코 사람들은 미국 음식을 먹는다. 멕시코가 이런 지경인데 상대적으로 미국과 유사한 문화를 가지고 있는 캐나다의 식생활은 말할 것도 없이 미국과 매우 흡사한 형태를 띠고 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조금씩이나마 육식을 ‘극복’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확산되는 추세이다. 채식주의자를 위한 전문식당이 있고 일반 식당에서도 채식메뉴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러한 흐름은 서구 사회 전반에서 공통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반면 한국과 멕시코에서는 육식을 ‘선호’하는 경향이 매우 가파른 상승곡선을 타고 있다. 멕시코가 미국과 맺고 있는 관계가 우리의 대미관계와 유사한 것으로 볼 때 이러한 현상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물론 어느 나라에서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육식을 선호한다. 문제는 그들이 나머지 1%를 위한 가능성을 열어두었느냐하는 점과, 그 1%를 조금이나마 확대하려는 의지가 있느냐하는 점이다.

  제레미 리프킨은 <육식의 종말>이라는 책에서 인류가 걷고 있는 육식 일변도의 생활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인지에 대하여 심도있게 다루었던 적이 있다. 전 세계 땅의 25%가 소를 키우는데 사용된다는 점과 지구에서 생산되는 전체 곡물량의 30%가 가축을 키우는데 사용된다는 점, 소를 키우기 위해 엄청난 양의 담수가 낭비되고 목축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자연파괴가 원전이나 자동차에 의한 것을 상회한다는 점 등은 이제 놀랄만한 일도 아니다. 나 또한 금욕적인 채식생활을 하지 않으며 육식을 선호하는 편이다. 고기를 먹는 행위를 무조건 비난할 생각도 없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고 싶은 점은 육식이라는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과도한 육식 위주의 생활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이다.

                                        육식 권하는 한국 사회

  현재 인류의 식단에서 육식이 차지하는 비중은 계속 높아지고 있다. 그 이유는 과거 개발도상국이었던 국가들의 전반적인 경제수준이 상승하면서 보다 나은 만족을 얻으려는 욕구 또한 증가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가 그러한데 이전에는 ‘쌀’로 대표되는 곡물 위주의 식사를 했다면 요즘은 쌀 대신에 ‘살’을 먹는다. 과거 쿠바나 우리나라에서처럼 국가의 경제적 성장과 더불어 정부에서 국민체력향상 등의 이유를 들어 육식을 장려했던 경우도 있다. 또 여기에는 서구인의 삶에 대한 제3세계 민중의 무조건적인 동경이 개입하고 있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삼겹살이라는 불세출의 메뉴가 등장한 이래 우리의 식탁에서 육식의 비중은 계속 올라갔다. 현재에는 스테이크나 바비큐, 치킨 등 파는 음식의 대부분이 육식으로 구성돼있어 오히려 야채나 과일을 찾기가 어려워졌다. 물론 이렇게 단순한 ‘육식인구’의 증가 또한 문제가 되겠지만 그보다 더한 문제점이 있다. 소고기를 예로 들어보자. 만약 열 명의 사람들이 부위에 상관없이 아무 부위나 소고기를 먹으려고 한다면 지금과 같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어떤 이에게는 안심을 주고 어떤 이에게는 등심을 주고 또 어떤 이에게는 홍두깨나 꽃등심을 주면 한 마리로도 모든 일이 해결된다. 문제는 사람의 욕구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이다. 요즘처럼 먹을 것이 풍부한 세상에서 맛없는 부위를 먹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고기에도 질과 가치라는 것이 존재한다. 열 명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꽃등심을 원하게 된다. 곧 열 명을 먹이기 위해서는 열 명 분량의 꽃등심이 필요하다. 한 마리의 소에서 일인분의 꽃등심이 나온다고 가정할 때 소는 열 마리가 필요하게 된다. 이처럼 육식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은 특정한 부위에 대한 소비자의 일반적인 욕구가 증가하면 할수록 가속화된다. 서구사회에서는 스테이크의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소를 더욱 많이 키우게 됐다. 한국에서는 삼겹살의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돼지를 더 많이 키우게 됐다. 닭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연예인이 닭가슴살로 근육을 키웠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닭가슴살을 따라서 먹는다. 이렇게 되면 닭의 사육두수 또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일례로 미국에서는 한 해에 약 2억 마리의 수컷병아리를 알에서 태어나자마자 분쇄기에 넣어 죽인다. 이유는 간단하다. 수컷은 사료가 들어가는 양에 비해 살이 안쪄 ‘경제적 효율’이 떨어진다. 근육이 많고 살도 질겨서 소비자들이 선호하지 않는다. 곧, 상품으로써의 ‘질’이 떨어지기 때문에 병아리들은 태어나자마자 죽는다. 이렇게 육식의 가속화와 사육하는 가축두수의 증가는 제레미 리프킨이 말한대로 자본주의의 발달과 동시에 증가하고 있다. 처음에는 고기를 먹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욕구가 축산자본을 이끌었다면 이제는 축산자본이 사람들에게 고기를 더 먹으라고 이끈다. 멀리서 찾을 것 없이 우리는 수많은 일례를 주변에서 발견할 수 있다. 회사에서는 삼겹살을 먹고 힘을 내어 회사를 위해 일하라고 말한다. 또 텔레비전에서는 아름다운 연예인들이 등장하여 스테이크를 먹으라고 종용하거나 닭가슴을 먹으며 자신과 같이 아름다운 몸을 만들라고 한다.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지내는 사이 한국은 이미 ‘육식을 권하는 사회’가 돼버렸다. 그렇다면 고기에 맛들인 한국사회에 어떻게 하면 올바른 음식문화를 퍼뜨릴 수 있을 것인가? 여기에 대해서는 어떠한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순 없을 것 같다. 우리나라의 육식을 선호하는 문화와 비만률은 동시에 증가하고 있다. 반대로 채식이나 다이어트를 택하는 사람들도 계속 증가하고 있다. 다만 조금이나마 예측해본다면 아마도 ‘육식문화’는 더욱 확산될 것이고 그만큼 ‘반육식문화’도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한 번 고기에 맛들인 한국사회는 계속 고기를 먹을 것이고 서구의 음식문화에 더 큰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

  요는 현재의 이러한 육식문화를 완전히 전복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다. 이는 불가능한 것이며 만약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개인의 취향과 선호의 문제가 달려있기 때문에 어떠한 선을 넘어설 수는 없다. 그렇다면 대안은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육식소비가 아니라 건강하고 적당한 범위 내에서 육식소비를 하도록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육식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한다. 특히나 아무 것도 모르고 고기를 좋아하기만 하는 아이들을 위해 건전한 음식문화와 적절한 수준에서의 육류 소비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 우리가 고기를 먹음으로써 환경에 얼마나 누를 끼치는가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또 소를 먹이기 위해 몇 명의 아프리카인이 굶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반드시 알아야 한다. 그러지 않고 무조건 환경에 나쁜 것이니 건강에 나쁜 것이니 해봤자 아무도 듣지 않는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더 무서운 게 아닌가! 늦게 배운 육식문화가 깊게 뿌리내리지 않은 지금 건전한 식생활에 대한 재고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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