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명 / <프레시안> 국제분쟁전문기자

 
 
2011년 초부터 중동에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들불처럼 번졌다. 튀니지에서 이집트를 거쳐, 아라비아 반도에 속한 예멘과 바레인, 그리고 시리아와 리비아로까지 민주화 시위의 바람이 불었고 곳곳에서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그 과정에서 리비아의 카다피 정권이 무너졌다. 아사드 부자의 2대 세습이 이뤄졌던 시리아를 비롯해 중동의 여러 독재국가들은 지금도 팽팽한 긴장 속에 민주화의 진통을 겪는 중이다.

중동 국가들 대부분은 왕에게 집중된 권력이 대를 이어 세습되는 독재왕조이거나 형식상 공화정이라도 독재국가들이다. 중동 독재자들은 서구의 석유 메이저들의 배를 불려주면서 엄청난 오일 머니를 축적해왔다. 그 오일 머니로 사들인 무기를 앞세워 국민들의 민주화 욕구를 누르면서, 한편으로는 국민들에게 기본적인 복지를 제공하여 욕구불만을 달래왔다. 그렇지만 이제는 한계에 부딪친 모습이다.

지구촌의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중동 민주화 바람에 박수를 보내지만, 속사정은 간단치 않다. 중동 정치변혁에는 석유라는 주요 변수가 있고, 중동 석유이권을 차지하려는 강대국들의 신자유주의적 패권 야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요점은 중동 지역에 대한 서구의 패권적 지배구도, 그리고 석유 자원에 대한 ‘실효적 지배’(지난날 한 나라의 영토를 점령하는 제국주의적 지배가 아니라 그 나라의 주권은 그대로 놔두되 사실상 정치경제적으로 장악하는 신자유주의적 지배구도), 그에 따른 중동 국민들의 희생과 정치적 욕구분출에 모아진다.
 

영화 ‘시리아나’와 새로운 거대게임

영화 <시리아나>(감독 스티븐 개건, 2006)는 미 중앙정보국(CIA) 공작원으로 20년을 일했던 실존인물의 글을 바탕으로, 석유 이권을 둘러싼 냉혹한 음모를 보여주는 정치영화이다.  영화의 제목 ‘시리아나’는 강대국의 석유 이해관계에 따라 짜여진 ‘중동의 새로운 지역구도’를 뜻한다. 영화는 중동 석유이권을 안정적으로 지배하려는 강대국과 석유 메이저의 최종목표에 걸림돌이 된다면, 중동 산유국의 왕자조차도 죽여 없애야 할 대상임을 냉정하고도 사실적으로 보여 준다. 한마디로 정치성이 매우 강한 영화다. 관객들은 이 한 편의 영화를 통해 ‘피 묻은 석유’를 둘러싼 강대국과 독재왕정의 갈등과 유착, 그리고 이들에 선을 댄 메이저 석유기업들의 음모와 각축이 지금껏 어떻게 펼쳐져 왔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영국계의 세계적인 석유기업 ‘브리티시 페트롤륨(BP)’의 <2011년 세계에너지 통계리뷰> 자료에 따르면, 2010년 현재 중동 지역(사우디아라비아, 이란, 이라크, 리비아, 알제리 포함)에는 전세계 석유 매장량의 59% 쯤이 묻혀있고, 전세계 석유생산량의 35% 쯤을 공급하고 있다. 21세기 들어 석유자원이 풍부한 지역에 대한 통제권과 영향력을 넓혀 가려는 각국의 경쟁을 가리켜 국제정치학자들은 ‘새로운 거대 게임’이라 부른다. 19세기에 남진정책을 펴던 러시아와 이를 막으려던 영국이 벌였던 ‘낡은 거대 게임’에 견주어 명명한 것이다. 21세기 들어와 벌어진 미국-아프간전쟁(2001), 미국-이라크전쟁(2003)은 이 새로운 거대 게임의 서막을 알리는 전쟁으로 볼 수 있다.

2011년 봄부터 6개월을 끌다가 반군이 수도 트리폴리를 점령함으로써 전환기를 맞이한 리비아의 상황도 석유를 빼놓고는 말할 수 없다. 리비아 카다피 체제 전복에 가장 열심인 나라가 프랑스였다. 2012년 대선에서 재선을 바라는 사르코지 대통령으로서는 ‘공공의 적’ 카다피를 몰아내는 데 앞장서 지지율을 끌어올리겠다는 계산을 했을 것이다. 또한 중요한 경제적 이유가 있다. 리비아는 세계 경질유 수요의 10%를 공급하고 있고, 프랑스는 리비아 경질유에 대한 의존도가 다른 나라들보다 높은 편이다(리비아 원유 수출의 15% 차지).

리비아 혼란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원유의 안정적 수급이 어려워진다. 더구나 카다피는 사르코지가 적대적 태도를 보임에 따라 리비아산 원유수출을 중국과 인도로 바꾸고, 프랑스에 배정된 리비아 유정을 국유화하려 했다. 사르코지로서는 하루빨리 카다피를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리비아의 새 정권과 거래를 터야 프랑스 경제도 살리고 재선도 바라볼 수 있다.
 

미 중동 정책의 이중잣대와 딜레마

2011년 중동 민주화 진통 과정에서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중동 지역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해 온 미국의 중동 정책이다. 오바마 미 대통령은 리비아의 카다피 국가원수와 예멘의 살레 대통령을 겨냥해 “그들이 물러나야 나라의 안정을 찾을 수 있다”며 퇴진을 촉구했으며 시리아의 아사드 대통령에게는 “시리아를 민주화로 이끌거나 물러나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오바마는 리비아, 시리아, 이란 등 중동의 반미국가들의 상황을 비판적으로 언급하면서도,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친미 독재 산유국들의 열악한 인권상황에 대한 지적은 하지 않았다. 미국의 중동 정책을 가름하는 잣대가 (민주냐 독재냐가 아니라) 친미냐 반미냐임이 또 다시 밝혀졌다.

리비아에 대한 무력개입에서도 미국은 이중 잣대를 드러냈다. 미국은 나토 공습이 독재자 카다피의 폭압에 저항하는 리비아 국민들이 더 이상 죽고 다치는 일이 없도록 이른바 ‘인도주의적 개입’의 성격을 지녔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미국은 왜 예멘과 바레인의 독재정권들로부터 공격을 받는 반정부 민주화세력을 위해 개입하지 않을까. 사우디아라비아의 독재왕정에 대해선 왜 침묵할까. 지금 이 시각에도 중동 이스라엘에는 1만 명의 팔레스타인 정치범들이 감옥에 갇혀 있다. 미국은 팔레스타인에서의 이스라엘의 인권침해 행위를 둘러싼 유엔안보리 표결에서 1982년부터 지금껏 32번의 거부권을 휘둘러왔다.

워싱턴의 중동 정책 입안자들은 전통적으로 ▲미국에 대한 중동석유의 안정적인 공급 ▲이스라엘 안보, 이 두 가지 축이 흔들려선 안 된다는 입장을 지켜왔다. 그렇지만 이스라엘과 유기적 협력관계를 맺어오던 이집트의 호스니 무바라크 친미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미국의 중동석유 주공급선인 사우디아라비아의 독재왕정마저 도전을 받는 상황이다. 중동 정치상황의 변화와 관련해 미국이 중동 지역에서 지금 가장 신경을 쓰는 지역은 리비아가 아니라,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다. 이스라엘은 전통적인 미·이스라엘 동맹의 차원에서, 사우디아라비아는 세계 최대의 산유국으로 미국에의 안정적 석유 수급이라는 차원에서다. 바레인과 예멘에서 민주화 요구를 둘러싼 정치적 위기에 미국이 관심을 쏟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사우디의 친미독재왕정의 안정이 미국의 국가 이익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중동 정치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용어가 ‘왕의 딜레마’이다.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중동 지역의 왕들이 민주화 요구를 억누르다가, 국민들의 인내심이 거의 폭발시점에 이르면 조금 민주화 숨통을 터주었다가 다시 죄기를 되풀이한다. 결국 ‘왕의 딜레마’란 ‘독재자의 딜레마’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 맞물려 미국의 중동 정책 딜레마가 나온다. 석유를 중심으로 한 미국의 이해를 챙겨주는 친미 독재자의 자리가 시민의 힘에 밀릴 때 그를 계속 지지하기도 어렵고, 무너지는 것을 그냥 보기도 어렵다.

미국의 친이스라엘 일방주의, 그리고 석유이권을 위한 중동 친미독재정권 유착-이 두 개의 축에 바탕을 둔 미 중동 정책은 당연히 이슬람권의 반미-반외세 정서를 증폭시켰다. 지구촌을 휩쓰는 테러의 뿌리를 보면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지원하고 중동의 독재자들과 유착한 미국의 잘못된 대외정책이 깔려 있다. 노암 촘스키를 비롯한 비판적 지식인들은 “미국의 일방주의적 패권추구가 끝 모를 테러전쟁의 시대를 열고 말았다”고 한탄한다. 미국이 친이스라엘 일방주의를 거두어들이고 석유를 비롯한 중동 정책을 전향적으로 바꾼다면, 테러도 줄어들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제2, 제3의 오사마 빈 라덴이 끊임없이 뒤를 이어 미국의 평화(팍스 아메리카나)를 어지럽힐 것이다.

2011년 가을 현재 중동은 국민들의 정치적 변혁 요구로 뒤숭숭하다. 중동의 독재자들도 위기감을 느끼고 있으며, 미 오바마 행정부도 중동 정책의 근본적인 수정이 요구되는 상황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이렇다 할 긍정적 변화를 보이지 못하는 모습이다. 오일 머니를 매개로 한 미국-중동 독재권력의 유착은 지금도 중동 민중들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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