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은영 / 한국외대 프랑스어학과 강사

 

   미국의 유명한 한 경영자는 자신의 손자에게 뭔가 꼭 한 가지만을 물려주어야 한다면 그건 ‘유머’라 이야기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힘, 즉 스토리텔링은 이제 자기를 표현하기 위한, 타인을 설득하기 위한, 조직을 경영하기 위한, 대통령이 되기 위한, 게다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장치가 됐다.

    정책으로 호소하는 정치, 시장원리에 따른 경제, 수칙을 준수하는 경영, 정보로 부딪히는 마케팅, 오락으로 즐기는 게임, 전장에서 혈전을 치루는 전쟁은 옛말이 됐다. 이제 정치는 감언으로 여론몰이를 하며, 경제는 신화적 비전을 제시해 주식을 급등시키고, 경영은 신기한 브랜드 스토리를 상품처럼 양산한다. 마케팅은 감성마케팅을 주창하고, 시뮬레이션 게임은 그 자체로 하나의 전략, 전쟁이 된다.

    <스토리텔링: 이야기를 만들어 정신을 포맷하는 장치> (2010)의 저자 크리스티앙 살몽의 말처럼, 이제 세상을 움직이는 건 이성이 아니라 감성이다. 이제 세상은 지식정보시대가 아니라, 이야기로 감성을 불러일으켜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관건인 서사시대다. 스토리텔링은 바로 이러한 서사시대의 가장 효과적인 감성 유혹 장치라 할 수 있다. 이야기로 남의 감성을 제 것으로 사로잡는 장치, 그러니까 이야기를 만들어 세상을 포맷하는 장치인 것이다.

    하지만 허구의 스토리텔링이 어떻게 세상을 움직이는 원리가 되고, 나아가 현실 자체가 될 수 있단 말인가. 당연히 의문이겠지만 분명 엄연한 현실이다. 현실의 허구화, 아니면 허구의 현실화는 우리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장 도처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심지어 세계가 지켜보는 미국 대통령 선거의 장에서까지 공공연하게.

    2004년 미국 대선 당시, 9·11로 인해 위험을 부르는 대통령으로 이미지가 각인된 조지 W. 부시의 재선은 사실상 불가능해보였다. 하지만 한 이야기가 불가능을 가능한 현실로 만들었다.

    2004년 5월 4일 부시는 오하이오 주 레바논에서 유세 중이었다. “대통령님, 이 아가씨가 세계무역센터에서 엄마를 잃었어요!” 그 외침에 부시는 돌아보며 “저도 그 고통을 압니다. 괜찮아요?”라고 물었다. 그리고는 엄마를 잃었다는 그 애슐리 포그너를 안아줬다. 옆에 있던 아버지 린 포크너가 그 장면을 사진에 담아 지인들에게 메일로 보냈고, 이어 그 사진은 며칠 만에 전 미국을 돌았다. 애슐리 가족이 ‘포옹’이라 불렀던 한 장의 사진은 결국 2004년 대선 기간 동안 3만 회나 방영될 부시의 대선캠페인 클립 <애슐리 이야기>로 각색된다.

    <애슐리 이야기>는 “내 와이프인 웬디는 9·11 테러리스트들한테 살해당했습니다”라고 말문을 여는 린 포크너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이어 카메라가 어린 두 딸을 감싼 웬디의 사진을 클로즈업하자, “엄마가 죽은 후, 딸 애슐리는 스스로를 가두어버렸습니다”라는 내레이션이 흐른다. 화면은 해먹에 누워 소설을 읽는 애슐리의 사진으로 바뀌고, “부시 대통령이 레바논에 왔을 때 애슐리는 4년 전 엄마와 그랬듯 대통령을 보러 갔습니다”라는 내레이션이 이어진다. 동시에 음악이 격렬한 리듬의 장조로 바뀌며 군중과 악수를 나누는 부시의 이미지가 연속으로 펼쳐진다. 이 때 그날 유세 현장에서 대통령에게 크게 외쳐 애슐리를 소개했던 린다 프린스가 당시의 상황을 설명한다. 이어 집 정원을 배경으로 애슐리가 이야기한다. “대통령은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제가 무사한지, 제가 괜찮은지를 확인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애슐리 이야기>는 경건한 자세로 고개를 숙인 부시의 옆 모습으로 끝난다.

    <애슐리 이야기>는 연구 대상이 됐다. 그 클립은 정치적 메시지를 전하는 데 9·11의 희생자인 한 소녀를 이용하였음에도, 그러한 악용에 대한 비판이 거의 일지 않았다. <살롱>지는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그 클립은 단지 60초짜리지만 실제 효과는 가공할 정도다. 서사의 일관성과 신뢰성을 뒷받침하기 위한 다양한 증언을 소개하는 짧은 장면이 빠른 편집을 통해 연속적으로 이어진다. 대통령은 서사의 중심인물이지만 자신을 표현하지 않는다. 구상을 설명하지도 강령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단지 공정하고 선할 뿐이다. 일종의 기적의 중개자인 그는 마치 복음 서사 속에서처럼 그의 몸짓과 말을 이야기하는 증언들을 통해 존재할 뿐이다.” 그렇다. 부시는 <애슐리 이야기> 속에서 한 소녀의 트라우마를 치유한 존재였고, 보호자였으며, 초자연적 존재였다.

    미국인들은 착각한 것이 아니었다. 애슐리를 안은 부시의 사진은 분명 연민을 가진 구원자, 곧 성인의 초상이었다. 살몽의 설명처럼, <애슐리 이야기>는 서사의 코드를 복음의 잠언에서 빌리고 있다. 그것은 위업의 서사, 기적적 치유가 따른 기념할 만한 만남의 서사다. 클립 후반을 보면, 마치 성인화를 상기시키는 몸짓과 후광 속에 대통령의 형상이 드러나게끔 교묘히 수정된 사진으로 부시가 뉴욕에서 한 소방관을 칭송하는 모습이 나온다. 평자에 따라 조작의 걸작이라 불린 <애슐리 이야기>는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든 현대판 신화였다. 부시는 구원자이자 성인이라는 허구를 창조하여, 국가에 위험을 부르는 인물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불가능한 현실을 창조한 신화의 인물이었다.

    스토리텔링은 분명 이 시대가 요구하는 필연적 커뮤니케이션 장치이다. 하지만 순기능과 동시에 역기능을 가진 이중적 장치인 것 또한 사실이다. 허구로 결국 현실을 창조하는 스토리텔링은 유혹적인 동시에 위협적인 야누스적 장치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이야기로 어떻게 남을 사로잡을 것인가와 동시에, 나를 사로잡으려는 타인의, 조직의, 국가의, 세계의 전략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함께 고민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실제와 가상, 혹은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무의미해지는 실존 속에서 스스로 자신의 온전한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진실에 대한 직시, 엄밀히 말해 상대적 진실에 대한 사유와 인식이 있어야 할 것이다.

저작권자 © 대학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