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찬 / 영어영문학과 박사수료

필경 모두에게는 한 권의 책이 있을 것이다. 그 존재 앞에서 몹시도 절박해지는 그런 책, 읽는 이에게 푼크툼으로 기어이 생채기를 입히고야 마는 그런 책 말이다. 하지만 이 결정적인 책은 일단 형식으로 존재할 수 밖에 없다. 내용은 각자가 채워 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가령 오래전 세르주 투비아나와 앙투안 드 베크가 쓴 프랑수아 트뤼포 평전을 읽을 때 나는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숭고해졌었다. 그리고 필립 라쿠-라바르트와 장-뤽 낭시가 공동으로 쓴 <문학적 절대>와 조우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독일 낭만주의를 다룬 이 책의 서문에서 저자들이 “우리의 작업은 고문서 연구가 아니다”라는 매력적인 단언을 제출해 주었을 때 나는 이들에게서 낭만주의가 그저 일개 문예사조쯤으로 역사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수준이 아니라 차라리 ‘문학 그 자체’라는 소중한 깨달음을 배울 수 있었다. 

라쿠-라바르트와 낭시는 독일 낭만주의, 보다 정확히는 독일 초기 낭만주의의 미학적 세례를 받음과 동시에 자신들의 본격적인 사상적 여정을 시작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들이 <문자라는 증서>라는 라캉에 관한 책을 쓴 것이 낯설지 않게 다가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저자들은 라캉 정신분석의 언어이론이 집약된 <무의식 속에서 문자의 심급, 혹은 프로이트 이후의 이성>이라는 논문에만 오로지 집중하고 있는데, “언어는 언어를 사용한 사람들보다도 더욱 자신을 잘 이해한다” 내지는 “언어는 스스로에 대해 걱정한다”라는 테제들에서 충분히 엿볼 수 있듯이 그들이 주목한 독일 초기 낭만주의자들 역시 대다수가 언어에 대해 첨예한 감식안을 견지한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독일 초기 낭만주의의 미학적 강령들이 느슨한 단장 형식으로 수록된 잡지 <아테네움>에서 그 주도자 역할을 한 슐레겔 형제는 무엇보다 언어의 아이러니 기능에 주목했다. 그들은 말했다. “마침내 아이러니의 아이러니가 있다.” 그런데 이 형식은 무한하다. 아이러니의 아이러니의 아이러니…… 식으로 그 연쇄는 자가증식 한다. 슐레겔 형제는 끝없이 배열된 거울들의 비유를 들어 이를 간명하게 설명해냈다. 가령 첫 번째 거울이 특정 대상의 형상을 담고 있는 경우, 두 번째 거울의 형상은 실제 대상의 형상이 아니라 첫 번째 거울에 나타났던 형상의 형상을 되비친다. 이런 식으로 거울 속 형상은 형상의 형상의 형상과 같이 무한히 반복된다는 것이다.

결국 언어의 은유적 기능으로부터 일종의 언어의 생산성이 비롯된다 할 수 있다. 그런데 언어적 기호를 구성하는 기표와 기의가 원천적으로 분리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언어의 의미, 그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문자라는 증서>의 저자들은 하이데거의 존재철학에 의지하여 언어의 모호성으로부터 진리의 순간을 끄집어내는 도약을 감행한다. 그러나 그 진리는 전지전능한 ‘데우스엑스마키나의 목소리’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 목소리는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그것은 무성(無聲)으로 소리친다. “소리칠 수 없는 증상의 외침.” 즉 한 순간의 번뜩임 속에서 진리가 명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라캉 자신은 이들의 해석에 주의를 요할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라캉은 문자의 문제를 진리 대신 윤리의 영역에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윤리에는 당위적인 요구와 의무만이 있을 뿐 이에 상응하는 보상의 차원이 부재한다. 결국 라캉은 존재의 진리성 대신 허무성 안에서 진동하는 쪽을 택한 것이다. 그렇지만 <문자라는 증서>는 저자들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라캉에 대한 ‘하나의’ 독해”일 뿐이다. 다른 독해의 가능성은 독자들 제위에게 얼마든지 잠재되어 있다. 무릇 이론이란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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