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우 / 사회학과 박사과정

질료가 있기에 분할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분할이 있기에 질료가 있다. 이 분할은 시니피앙에 의해 창출된다. 대상, 주체, 대타자 등 의미 생산의 중심이라고 여겨졌던 모든 것은 안정적이고 빛나는 중심점이 아니라 구멍을 가지고 있는 결여다. 이렇게 해서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의 연합을 통한 의미생산은 근원적인 불확실성에 노출된다. 의미를 고정시킬 수 있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의 시니피앙을 다른 하나의 시니피앙에 고정시킴으로써 일시적인 누빔점을 만들어낼 때 뿐이다. 하지만 이 역시 언제나 새로운 의미화를 출현시킨다.

이 책, <문자라는 증서>는 이미 40년 전에 출간된 책이고, 그 만큼이나 새로운 라캉 읽기라기 보다는 현재까지도 재생산되고 있는 라캉 읽기의 표준에 가깝다. 안정적인 중심으로서의 주체, 객관으로 끊임없이 다가갈 수 있는 주체의 능력, 주체에 의해 지배되는 의미생산 등으로 채워져 있는 근대적 논리의 지반을 허물어냈던 그 명제들이다.

사실 라캉의 해석에 대해 무언가를 덧붙이거나 빼는 것은 필자의 능력을 넘어선 문제다. 하지만 라캉 해석이 번역되어 출간된 상황에 기대어 한마디 던지고 싶은 말은 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라캉을 계속해서 ‘근대성 해체의 프로젝트’ 내에서 전유할 것이냐 하는 문제다.

자산의 ‘가치’, 즉 자산이 관련자들 사이에서 갖는 ‘의미’는 객관적인 형태로 존재하지 않으며, 가격이 변동해가는 정상적 경로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가치는 무한한 정보게임의 연쇄사슬 속에서 끊임없이 미끄러질 뿐이다. 자산 가격은 오직 ‘불확실성’의 세계에 속해 있는 것이다. 그것이 미래에 어떻게 변화할지에 대해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가치에 ‘적절한 위치를 부여’하는 것도 근본적으로는 불가능하다. 돈을 벌고 싶다면 꼭 그만큼의 리스크를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확률과 리스크의 게임이 새로운 세계의 원리로 부상했다. 그리고 이 쿨한 명제는 50년도 채 안돼서 자산 가격 결정 모델, 효율적 시장 가설 등을 거쳐 신자유주의의 핵심 제도들을 쏟아냈다. 국가나 사회가 시장에 개입하여 어떤 ‘고정점’을 부여하겠다는 식의 이야기는 무시되어 마땅한 것이 되고 말았다. 인간 주체가 가치를 규정하고 지배할 수 있다는 오만이 제거된 자리에 새로운 자유의 세계, 유동의 세계가 채워졌던 것이다.

뜬금없이 웬 금융공학 이야기냐고 할 수도 있겠다. 필자가 주목하는 건 이 신자유주의의 리스크 계산 논리가 라캉 및 라캉 읽기가 재생산해온 명제들과 너무나도 닮았다는 점이다. 가치(의미)의 안정적 위치가 제거되고 불확실성이 핵심적인 세계의 독법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이 상황을 창출하는 중요한 근원은 정보의 미끄러짐이다. 라캉이 노이만, 모겐슈테른 등 게임이론가들의 영향을 받았고, 게임이론이 현대 금융공학 탄생의 중요한 모태 역할을 했음을 고려할 때 이 유사성을 단순한 추측이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다.

필자에게도 당황스러운 상황이고, 똑부러진 해법도 어떤 결단을 촉구할 용기도 아직은 없다. 하지만 <문자라는 증서>를 집어드는 독자와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공유해 볼 수는 있지 않을까 싶다. 2011년을 경과하고 있는 시점에서, 사람들의 근심거리가 불확실성의 세계에 알몸으로 노출되어 있는 것으로부터 연유하는 것이라면 라캉은 이 사태를 어떻게 대할까. 한편으로는 삶을 견뎌내기 위해 어떤 안정성의 기초를 절실히 필요로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안정성을 위한 기획이 하나의 누빔점일 뿐임을 인정해야 하고 따라서 그 기획이 어떤 원초적 정당성도 가지고 있지 않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는 이율배반의 상황이 바로 문제의 상황이라면, 라캉은 이제 어떻게 재전유되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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