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호 / 경희대 지리학과 석사

작년 가을, 필자는 <한겨레21>에 노숙인 관련 글 두 편을 기고했다. 결과는 화려했다. 평생 받아보지 못할, 정말 부담스러울 만큼의 주목을 받게 되었으니까. 그러나 실로 난감한 부분도 있었다. 노숙인과 비(非)노숙인 사이에 애매하게 끼어, 어느 한 쪽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위치가 돼버린 것이다. 필자가 강의를 하거나 글을 쓸 때면 그 대상이 어느 쪽이었든 온갖 비난과 비판을 감수해야 했다. 노숙인에겐 ‘당신이 감히 우리를 제대로 이해한다고 할 수 있는가’는 식의 비난이, 비노숙인에겐 ‘당신의 주장은 흥미롭지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는 식의 비판이 이어졌다. 물론 전혀 예상치 못했던 건 아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 됐던 것일까. 아니, 과연 ‘잘못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90년대 후반 노숙인의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이래, 우리사회에서는 수많은 노숙인 관련 논의가 있어 왔다. 여기에는 공통점이 있다. 노숙인을 ‘구호’와 ‘예방’의 대상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노숙인은 어떻게든 ‘구해주고’, 비노숙인은 노숙인이 되지 않도록 ‘예방하자’는 것이다. 필자의 문제의식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노숙인은 정말 사회적으로 ‘제거’ 되어야만 하는가. 다시 말해 자본주의 담론이 장악한 현대의 도시 공간에서 노숙인은 과연 어떤 주체로 ‘생산’되며, 또 ‘발명’되고 있는가.

자본주의 사회의 중심 강령은 ‘교환가치’다. 즉 ‘어느 정도의 화폐가치를 갖는가’라는 기준이 현대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기제로 작동하고 있고, 이 기준에 의해 모든 것들은 객체화 된다. 이때 노동인구나 소비인구로 존재하지 않는, 게다가 도시공간을 ‘사용가치’로 전유하려는 노숙인의 경우, 가장 우선적인 배척대상으로 간주된다. 자본의 논리에 의해 노숙인의 사회적 위치가 ‘배제의 대상’으로 ‘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한 배제의 논리는 노숙인의 특정 모습만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이른바 ‘(발견이 아닌)발명’된 이미지에 의해 더욱 견고해진다. 우리가 ‘말끔한’ 차림으로 ‘평범한’ 행동을 하고 있는 노숙인을 노숙인으로 인식하지 않고 그냥 지나쳐 버리는 상황을 떠올려 본다면 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즉 노숙인은 ‘더럽고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 ‘더럽고 이상해야만 하는’ 사람으로 존재한다. 사회가 그들을 그렇게 ‘생산’하고 ‘발명’했기 때문이다.

한편 ‘동정 받을 가치가 있는’ 노숙인이 ‘자본주의 체제에 순응하고자 노력하는 자들’로만 한정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작년에 발간돼, 큰 호응을 얻고 있는 잡지 ‘빅이슈’와 이에 동참하고 있는 노숙인들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도 바로 노숙인들이 ‘노동의 주체’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정당한 노동을 하고, 이를 통해 가치를 창출하며, 궁극적으로는 체제 유지에 일조하라는 자본주의 사회의 요구가 이미 사람들의 인식 구석구석에 뿌리박혀 있는 것이다.

“노숙은 했지만 노숙인이 될 수는 없었다.” 필자가 서울역에서 3개월가량 노숙을 한 후 지인들에게 했던 말이다. 이는 앞서 언급했던 ‘노숙인의 사회적 생산 및 발명’과 연결된다. 요컨대 노숙인은 ‘노숙을 하기 때문에’ 노숙인이 아니라, ‘노숙인이기 때문에’ 노숙인이다. 다시 말해 노숙인과 비노숙인 사이의 경계는 ‘집에서 자는가, 아니면 거리에서 자는가’에 의해 설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가 요구하는 일정한 기준 및 행동양식을 충족하는가’의 문제로 결정된다. 게다가 자본주의 체제와 노숙인 사이의 연결고리가 비노숙인뿐 아니라 노숙인의 인식 속에도 ‘상식’처럼 박혀 있다는 사실은, 필자를 노숙인과 비노숙인 사이의 모호한 지점에 위치시켰다. 인권이나 복지를 외치는 노숙 당사자들조차 체제순응적 사유를 자본주의적 언어로 풀어내고 있기에, ‘체제 그 자체’, 혹은 ‘체제 밖’을 얘기하고자 했던 필자의 외침은 노숙인과 비노숙인 모두에게 허망한 울림으로 끝나버렸다. 결국 자본주의적 사고를 토대로 소통을 시도했던 양측이 좀처럼 합의에 이르지 못했던 건, 자본주의 체제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노숙인을 ‘체제 안으로 편입시키자’는 주장 자체가 모순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존엄한 인간으로 노숙인을 바라보자고, 욕구의 차원을 넘은 욕망의 주체로 노숙인을 이해하자고 주장한다. 백 번 지당하다. 그런데 방법이 틀렸다. ‘체제유지’를 전제로 타협을 시도하기 때문이다. ‘차이’가 ‘차별’적으로 용인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숙인과 비노숙인이 수평적 관계에서 소통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고, 따라서 근본적 해결책도 있을 수 없다. 노숙인이라는 주체가 애초부터 ‘탈피해야만 하는’ 대상으로 규정돼 있는데, 그들의 존엄성이나 복지 문제를 논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나 노숙인에 대한 사회적 ‘위치짓기’를 해체하려는 시도는, 종종 ‘현실성 없는 이상적 주장’으로 폄하되곤 한다. ‘상식’을 거부한다고, ‘동일성의 원칙’을 깨고 ‘차이’를 드러내려 한다고 사회로부터 일방적으로 배제되곤 하는 이 모습이 바로 현대사회의 자화상인 셈이다. 이제 바야흐로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에 대한 재성찰이 필요한 시기다.

※ 김준호 씨는 70여 일 동안 서울역에서 노숙인들과 섞여 노숙 생활을 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석사학위 논문 <거리 노숙인이 생산하는 차이의 공간에 대한 연구: 서울역 거리 노숙인을 중심으로>(2010)를 썼다. 이는 기고문과 함께 <한겨례21>(827호)를 통해 발췌 소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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