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욱 / 영화평론가,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 수석프로그래머
<블랙 스완>( 대런 애로노프스키,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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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의 영화에서 우리는 무엇을 말해야 할까. 주제일까, 이야기일까, 형식일까, 아니면 인상 깊게 본 장면들일까, 혹은 이 모든 것일까. 대런 애로노프스키의 신작 <블랙 스완>(2011)을 본 후에 새삼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이 영화가 뭘 말하려는 것인지 가늠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영화가 난해했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다몰아치는 영화였다. 누군가는 ‘발레리나의 예술적 고통을 그린 영화’라 말했고, 다른 이는 ‘찰나의 아름다움을 보여준 영화’라고 말했다. 모두 틀린 말은 아닐게다. ‘블랙 스완’이 되고자 하는 ‘화이트 스완’의 이야기는 물론 고통스럽기도 했고, 아름답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단정 짓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이 영화는 ‘왜’라는 문제를 결코 분명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왜 그녀는 성적으로 미숙하고, 그 나이가 되도록 어머니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동료들과 제대로 소통하지 못하고, 자신의 신체적 고통을 토로하지 못할까. 이 모든 ‘왜’라는 질문은 아마도 이 영화가 배제해둔 것으로, 영화는 처음부터 환각에 빠진 니나(나탈리 포트만)가 부유의 상태에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니나가 지하철에서 자신과 흡사한 여인의 형상을 본 뒤로, 마치 당연한 것처럼 그녀의 착란적인 비전이 영화 내내 반복된다. 드라마의 개연성이나 심리적 원인의 설명이 부족하다고 비난하자는 것은 아니다. 체계적으로 그것이 누락되었다는 것이 오히려 이 영화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인물의 감정 상태에 대한 여하한 설명은 극의 긴장을 이완시킬 수 있다. 감독은 그러나 생략으로 모든 효과를 극대화하면서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을 환각의 롤러코스터에 탑승시킨다. 잠시 멈춰서 쉬거나 올려다 볼 시간이 없다. 그리하여 영화가 끝난 뒤에야 내가 본 것이 무엇인지 되묻게 된다.
이 영화를 두 편의 영화 어딘가에 위치시켜보고 싶다. 그 하나는 발레리나의 이야기를 다뤘다는 점에서 떠오른 마이클 포웰의 <분홍 신>(1948)이다. 하지만 더 비슷한 맥락이라 생각된 것은, 다소 엉뚱하게 들리겠지만, 브라이언 드 팔머의 <캐리>(1976)다. 발레리나 니나(나탈리 포트만)의 가정환경과 어머니의 압도적인 존재성이 <캐리>의 장면들을 떠올리게 했다. 니나는 가정과 뉴욕 발레단의 두 세계에 위치하는데, 캐리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는 두 세계에서 점점 소외감을 맛본다. 그녀가 여왕으로서 공연장의 관객들과 동료, 스승에게 환대받는 것은 불안이 그녀의 영혼을 완전히 잠식했을 때다. <캐리>의 경우 이러한 에너지의 파괴적인 힘은 60년대의 정치적 트라우마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블랙 스완>에서 하얀 스크린을 채워버리는 어두운 영혼은 과연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