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혜련 / 전북대 과학학과 교수


 일찍이 프로이트는 <문명 속의 불만>(1930)에서 기계에 의한 인간의 확장을 비극적으로 고찰했다. 인간은 문명을 이루고 살 수 밖에 없는 존재이며, 이 문명 속에서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며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고, 다른 이들과 더불어 살아야 하며, 때문에 자신의 욕구만 내세울 수는 없다. 자신의 욕구만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욕구도 있기 때문에 욕구와 욕구의 충돌 속에서 인간은 또 다른 욕구를 갖게 된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욕구 외에도 다른 욕구가 있다. 인간은 육체가 가진 한계를 극복하고 점점 더 강력한 육체를 갖기를 갈망한다. 따라서 인간은 육체 이외의 다른 보족 장치를 필요로 한다. 프로이트는 이를 신을 모방하려는 인간의 욕망으로 설명한다. 그는 모터를 인간 근육의 확장, 안경과 망원경과 같은 시각 장치들을 인간 시각의 확장, 축음기를 청각의 확장 그리고 전화를 목소리의 확장으로 설명한다. 더 나아가 그는 기술이 진보하면 할수록 인간은 훨씬 더 많은 보족 장치를 자신의 육체에 보충할 것이라고 보았다. 기계에 의해 재편된 육체를 가진 인간은 과연 행복할까. 프로이트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프로이트가 이러한 기계와 인간의 불행한 만남을 이야기한 후 30년 뒤 또 다른 이론가가 기계와 인간의 만남을 이야기한다. 그가 바로 맥루언이다. 맥루언은 <미디어의 이해>(1964)에서 매체와 인간의 만남을 인간의 확장으로 이해한다. 기계를 일종의 보충으로 봤다는 점에서 두 이론가의 관점은 일치하지만 기계에 대한 전망은 달랐다. 맥루언은 이에 대해 매우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한계를 가지고 있던 인간 지각이 다양한 기계적 장치들에 의해 확장되기 때문에, 인간에게 새로운 차원의 지각과 경험이 가능해졌다고 본 것이다. 맥루언은 프로이트에서 더 나아가 외부에 존재하는 기계와의 만남을 통한 인간의 확장까지도 포함해서 이야기한다. 이 때 기계는 인간과 별도로 존재하는 객체이다. 그렇다면 이 경우 인간은 기계와 만나야 한다.

 


 

                                      인터페이스, 기계와 인간의 만남의 광장

각각 별도로 존재하는 인간과 기계가 만나는 지점이 바로 인터페이스다. 인터페이스는 기계와 인간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접점이다. 인간이 기계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인터페이스를 통과해야만 한다. 그런데 프로이트가 이미 말했던 것처럼, 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우리 인간은 많은 기계들과 만나야 한다. 즉 수많은 인터페이스를 만나게 된다. 갈수록 다양해지는 기계들 속에서, 또 필연적으로 그 기계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어느덧 기계들은 넘어야 할 큰 산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갈수록 두꺼워지는 각종 기계의 매뉴얼들, 그 속에서 우리는 인간이 확장되기 이전에, 불편함과 어려움을 먼저 느낀다. 인간에게 불편함을 주는 기계라면, 그 기계는 더 이상 인간의 확장을 가져오는 보족 장치가 아니라, 인간을 옭아매는 장치가 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기계와의 만남을 통한 인간의 확장도 거부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기계가 발전하면 할수록 인터페이스도 중요해진다.

인터페이스가 사용자 친화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어떠해야 하는가. 사용자 친화적인 인터페이스가 가져야 할 첫 번째 전제 조건은 ‘접근 가능성’의 용이함이다. 이것이 없다면 그 인터페이스는 실패한 것이다. 특히 디지털 매체와 관련해서는 더욱 그렇다. 잘 알려진 것처럼, 디지털 매체가 만들어낸 공간은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나’가 접근할 수 있는 공간이다. 때문에 누구든 이 공간으로 들어가는 출구를 쉽게 찾을 수 있어야 하고, 또 그 출구를 쉽게 열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인터페이스의 역할이다.

                                                  자연적 인터페이스

인터페이스가 접근 가능성이 용이한, 사용자 친화적으로 되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인터페이스의 존재를 최대한 감춰야 한다. 사용자는 인터페이스의 존재를 느끼지 않아야 한다. 있지만 없는 듯 작동해야 하는 것이다. 마치 안경이 나의 일부로 느껴져서 때로는 안경을 낀 채, 세수하는 일이 발생하듯이 말이다. 이 때 안경은 나와 분리된 안경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아주 자연스럽게 내 신체의 일부로 받아들여진다. 이러한 친근함을 갖추기 위해서 인터페이스는 지극히 익숙한 작동 방식에 기초해야 한다. 디터 다니엘스는 이 친숙하고 익숙한 인터페이스를 ‘자연적 인터페이스’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볼터와 글루신은 ‘투명한 인터페이스’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설명한다. 둘 다 같은 이야기다. 자연적 인터페이스와 투명한 인터페이스는 결국 사용자 친화적인 인터페이스가 도달해야 할 궁극적인 지점이다. 인터페이스는 지극히 자연스러워야 하고, 또 자신이 없는 듯하게, 즉 마치 투명 인간처럼 투명하게 존재해야 한다. 이렇게 존재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인터페이스를 통해 매체 세계와 만날 때, 매체가 매개되어 있음을 숨겨야 한다. 매체는 비매개성에 의해 투명한 인터페이스를 확보할 수 있다.

디지털 매체가 만들어내는 공간에서는 이러한 인터페이스의 구축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프로이트나 맥루언이 이야기한 것처럼, 기계와 매체를 단순히 인간의 확장으로 볼 수 있는 단계가 지났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제 단순한 객체로 존재하면서, 사용자에게 자신을 친화적으로 보이는 단계를 넘어섰다. 기계는 이 단계에서 더 나아가 스스로 하나의 매체적 환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80년대에는 이러한 매체적 환경에 적극 반응하기 위해서 데이터 장갑이라든가 HMD(head mounted display)가 인터페이스로 고안되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이러한 인터페이스들은 자연스러움과 투명함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자신의 존재를 명확히 드러낸다. 특정한 사람만이 아니라, 보통의 일반적 사람들이 매체적 환경에서 상호 작용을 하고 있는 지금이야 말로 정말 자연적 인터페이스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기다. 원격 현전(통신매체를 통해서 어떤 환경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환경 또는 대상을 경험하는 것)이 지금보다 좀 더 다양화되기 위해서는 좀 더 자연적인 인터페이스가 필요하다. 다양한 상호 작용을 위해서 말이다.

                                             무엇을 위한 상호 작용인가

디지털 매체 시대에서 이전의 프로이트와 같은 전망을 가진 이가 있다. 그가 바로 비릴리오다. 그의 이론의 핵심은 기계에 의해 인간이 확장되고, 인간들이 만날 수 있는 공간이 더 넓어지고, 다양한 지각을 체험하게 되었는데, 그래서 과연 인간이 더 행복해졌는가라는 것이 다. 사용자 친화적 인터페이스는 인간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인터페이스를 통해 들어간 세상, 그리고 만남들이 인간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가는 다시 논의 돼야 할 문제다. 플루서의 말처럼 인간은 존재 자체가 고독하고, 또 죽음을 향해 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커뮤니케이션할 수밖에 없다면, 지금의 커뮤니케이션 방법이 이 고독함을 덜어 줄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던져야 한다. 결국 사용자 친화적 인터페이스에 관한 문제는 인간의 의사 소통과 관련된 근본 문제들을 함께 가지고 가야 하는 것이다. 트위터 또는 페이스북 등의 새로운 소셜 네트워크로 인해 과연 인간은 전보다 더 원활하게 상호 작용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사용자 친화적 인터페이스 문제는 결국 휴머니즘 문제와 길을 함께 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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