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우 / 사회학과 박사과정

장하준이 ‘자유 시장 이데올로기’라고 부르는 것, 즉 가장 효율적이고 공정한 자원 배분을 위해 모든 것을 자유 시장에 맡기자는 믿음에 대해 많은 이들은 불만을 가지고 있다. ‘시장에서 경쟁 능력이 없는 사람은 어쩌란 말인가’라는 자학 섞인 불만일 수도 있겠고, ‘돈 밖에 모르게 만드는 비인간적 사회’, ‘부자들만 더 배부르게 하는 사회’와 같이 도덕 교과서의 한 구절을 되뇌는 방식일 수도 있다.

그 밖에는 무엇이 있을까. 문득 자유 시장을 비판하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앞서의 몇 가지 협소한 내용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거창한 대안들이 제시되기도 하고, 때론 심오한 철학적 사유에 바탕을 두고 이야기되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감정적 불편함의 표시이거나 자유시장의 정당성에 대한 비판, 둘 중 하나의 경우를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모두 중요한 비판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 논리들이 힘 있는 자들의 ‘점잖은 무시 (benign neglect)’를 뚫고 나가기에는 역부족인 듯 보인다. 세상은 그저 ‘좋은 얘기’에 쉽게 대꾸해주지 않는다.

장하준이 접근하는 방식은 조금 다르다. 그의 질문은 ‘세상이 실제로 어떻게 돌아가는가’이다. ‘자유 시장’, ‘지식 서비스 산업으로의 산업 이동’, ‘세계화’와 같이 자유 시장 옹호자들이 철석같이 현실이라고 믿고 있던 것들, 세상 사람들이 현실이라고 믿고 행동의 기준으로 삼았던 것들에 대해 ‘그게 정말 현실이야?’라고 묻는다. 그리고 그의 답변은 ‘아니거든요’다. 자유 시장은 수많은 규제를 숙주로 하여 기생하고 있고, 제조업의 실질 수요는 그다지 변하지 않았으며, 자본에는 언제나 국적이 있다. 금융공학과 계량 경제학으로 무장했던 ‘과학자’들이 ‘신학자’가 되는 순간이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자유 시장 이데올로기는 잘해봐야 ‘좋은 얘기’에 불과하다.

단편적으로 쪼개져 있는 글의 구성에 불만을 가지면서도, 이 접근 방법만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는 이유를 몇 가지 덧붙여 보려 한다. 우선 ‘자유 시장이라는 논리’와 ‘자원이 생산되고 배분되는 현실’이 점점 더 분리돼가고 있기 때문에 장하준의 문제의식은 유의미하다. 짧게 잡아도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감세를 기초로 하는 균형 재정의 원리는 점점 더 비현실적인 것이 돼가고 있고, 각국 중앙은행들은 대형 금융기관들의 영업에 보다 깊숙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자본 통제의 필요성은 증대되고 있고, 주주가치 경영은 ‘바보 같은 짓’이라는 발언들이 그 창시자들의 입에서 줄줄이 나오고 있다. ‘자유 시장은 실재하는가’라는 질문이 어떤 신화를 폭로하는 데에만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를 포착하는 프레임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 접근이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환상 속의 유토피아를 현실에 억지로 찍어내려 할 때, 바로 그 지점에서 극단적인 폭력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유로화 가치를 유지하고 국가 채무 상환 능력을 제고하겠다는 발버둥이 그리스인들과 아일랜드인들을 15%에 육박하는 실업률과 대규모 복지 삭감, 공공부문 민영화와 연관된 가계 생활비용 급등의 상황으로 내몰았다. 지진과 쓰나미, 원전 사고를 겪은 일본에게 국제 채권자 집단이 ‘당신네 나라는 이미 국가채무가 200%를 넘어섰으니, 재정지출 줄이고 금리를 올리라’고 요구하고 나서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까. “지금이라도 세계를 퇴보시키고 재앙의 구렁텅이로 내몰았던 원칙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시 예전과 비슷한 대참사들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라는 장하준의 충고가 의미심장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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