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학교 대학원신문
인터뷰, 임근준
최종편집 : 2020.1.2 목 12:52
기획문화
스토리텔링은 어떻게 달라졌는가오세정 / 한양대 학부대학 교수
유하은 편집위원  |  joyskyk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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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8호]
승인 2011.03.31  21: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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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늘 이야기를 하면서 산다. 때문에 스토리텔링이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그런데 최근 ‘이야기하기’의 번역어처럼 보이는 ‘스토리텔링’이 막강한 힘을 발휘하면서 문화·산업·교육 영역에서 득세하고 있다. 왜 그럴까. 예전부터 있어 왔고, 누구나 해왔던 일이 새삼 이렇게 붐을 이루는 것에는 무언가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21세기 오늘날의 맥락에서 스토리텔링이 새롭게 조명받는 이유와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스토리텔링은 과거와 달리 다양한 영역에서 그 의미와 용도를 확장하고 있다. 전통적 의미에서의 스토리텔링이 이야기의 구술전승을 의미했다면, 이제는 이야기가 결합된 모든 영역에서 스토리텔링이 행해지고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가령 교육적 목표를 위해 이야기를 들려주는 행위, 제품 판매를 위한 전략으로써의 스토리텔링, 커뮤니케이션 기법이나 양식으로써의 스토리텔링이 존재한다. 그리고 디지털 환경 속에서 새롭게 탄생한 각종 문화 상품 내지 콘텐츠에서 스토리텔링은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행위를 모두 스토리텔링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메시지와 스토리를 동의어로 보지 않는다면 스토리텔링은 다른 메시지 전달 형식과는 다른 점이 있다. 일반적으로 메시지를 단순히 나열한다거나, 논증이나 설명, 묘사와 같은 양식이 아니라 이야기, 즉 ‘서사’의 양식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서사는 사건과 등장인물, 배경이라는 요소를 가지고 시작과 중간, 끝이라는 시간적 흐름을 따라 기술되는 양식이다. 동일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하더라도 전달 방식에 따라 그 효과는 달라진다. 가령, 역사적 사실을 연대기로 기록한 도표로 보는 것과 소설이나 영화와 같은 서사(이야기)의 양식으로 접하는 것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이야기 갈래 중 가장 고형이자 원형으로 인식되는 신화는 뮈토스에 기원을 두고 있다. 뮈토스는 ‘전통적 이야기’라는 뜻과 ‘틀’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다시 말해 정해진 방식의 이야기하기가 존재했던 것이다. 다양한 서사체들이 존재하지만 이를 아우르는 공통의 구조가 있으며, 이것은 신화와 같은 전통적 이야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프로프나 구조주의 서사학자들이 말했던 서사 구조 혹은 서사 문법이 바로 이야기의 뮈토스 찾기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 뮈토스는 부침을 겪는다. 태초의 이야기는 신화나 설화와 같이 구술전승되는 이야기였지만, 이후 역사가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경험적 이야기와 허구적 이야기로 구분됐고, 역사와 문학이라는 분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역사는 과학이 되고자 했고, 문학은 예술이 되고자 했다. 특히 ‘문자’에 의한 기록 행위는 전통적인 이야기, 이야기하기의 권위와 풍속을 약화시켰다.

    역사는 증거물을 통해 사실만을 기술할 뿐 전통적인 이야기하기와는 차원이 달랐다. 문학은 전대와 달리 의식 있는 저자의 인위적 조작을 통해 단순히 이야기하기가 아닌 고도의 플롯 짜기에 집중했다. 근대 문학의 총아인 소설은 더 이상 전대의 스토리텔링이 아니라 스토리라이팅 혹은 플롯팅이었다.

    그런데 탈근대의 징후가 농후해질 무렵, 이야기의 운명이 바뀌기 시작했다. 근대에 확립되었던 각종 도그마와 이데올로기가 해체되고 새로운 영역이 구축되기 시작했다. 허구적 세계, 이야기의 세계와 결별했던 역사에 대해 헤이든 화이트는 역사 역시 하나의 이야기 기술 형식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잘 짜여진 언어적 구성물의 결정판인 소설은 독자들로부터 외면받기 시작했다. 이제 스토리텔링은 과거의 구술전승이나 문학 양식 중 서사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문학과 예술 장르, 비문학적 기술물, 상업적 광고를 비롯한 영상 매체로 전달되는 수많은 텍스트에서도 스토리텔링이 존재함을 새롭게 인식하게 됐다. 리쾨르는 이미 <시간과 이야기>(1983-85)에서 시간은 서사의 방식으로 조직되는 만큼 인간적 시간이 됨을 지적했다. 또한 프레드릭 제임슨은 시간을 통한 언어의 모든 활동이 본질적으로 서사적이며, 서사의 모든 정보 전달 과정은 인간 심성의 중심적 기능이라고 했다.

    이야기, 이야기하기의 본질과 기능을 회복하는 순간, 이야기는 새로운 매체 환경을 만나게 된다. 엄밀히 말하면 오늘날 문화, 매체 환경이 주변부로 몰렸던 이야기를 중심부로 소환했다고 봐야 한다. 인간의 매체는 구술에서 기술로, 이제 영상으로 변화했다. 문자로 대변되던 이성중심주의에서 영상으로 상징되는 다의성, 유희성으로의 전화(轉化)는 많은 문화적 변화를 낳았다. 또한 디지털 기술은 인간의 모든 생활과 문화에 일대 변혁을 가져다 주었다. 문자문화가 갖는 기록성, 전문성, 개인성, 일방향성 등은 더 이상 영상문화와 디지털문화에 적합하지 않았다. 오히려 구술문화의 양방향성, 통합성, 단순성, 원형성, 집단성 등이 현대의 매체 문화와 더 친연성을 맺고 있다.

    ‘이성’이 자리를 비운 무대의 주역을 ‘감성’이 차지한 것도 아주 큰 영향을 미쳤다. 이념이나 논쟁보다는 문화와 유희를 추구하는 사람들, 합리적 소비보다는 감성적 소비를 하는 사람들,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유혹하기 가장 좋은 것, 그것은 바로 가장 재미있는 것이어야 한다. 이야기만큼 좋은 것이 또 있을까. 아라비아의 최고 권력자가 선택한 여성은 부나 명예를 가진 자도 아니고, 아름다운 얼굴이나 몸매를 가진 여성도 아닌 최고의 이야기꾼이 아니었던가.

    어떤 것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스토리텔링 열풍에는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이 공존한다.  이야기와 이야기하기의 가치를 복원하고 그 기능과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는 점은 환영할 만하다. 하지만 뭐든 이익을 남길 것 같으면 장사꾼들이 모여들고, 그걸 이용해 다른 목적을 충족시키려는 자들이나 원 소유주나 전문가임을 자처하는 자들이 들끓기 마련이다. 또 이로 인해 소외되는 집단이나 위축되는 문화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너무 걱정할 일은 아니다. 인간의 역사와 문화를 돌아 볼 때 이 같은 현상은 늘 있어왔다. 이 정도만 기억하자. 태초에 이야기가 있었고, 인간이 생존하는 동안 이야기하기는 계속될 것이며, 인간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이야기는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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