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광 / 경희대 영문과 교수

    일상에 묻혀 있긴 하지만 ‘전쟁’은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중요한 키워드다. 북한이라는 대량살상무기를 갖춘 무장 세력이 걸핏하면 전면전을 불사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는 상황이 상수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발언은 말에 그치지 않고 천안함이나 연평도 사건처럼 구체적인 ‘도발’의 형태를 띠고 안전한 사회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다수 ‘한국인들’이 전쟁을 반대한다는 의지를 명확하게 표명하는 것은 자신의 안위를 염려하는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천안함 사건 진상규명을 통해 북한에 대한 강한 응징을 주장했던 집권 여당이 지방선거에 참패한 것은 전쟁 반대에 대한 ‘국민’의 의사가 선명하게 드러난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전쟁을 반대하는 분위기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연평도 포격 사건이 있었을 당시 한국 사회 대다수 구성원들은 북한에 대한 적절한 대응을 주문했고, 북한이 전쟁을 일으키면 자원 입대라도 해서 싸우겠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또한 소말리아 해적 진압 작전에서도 많은 한국인들은 정부의 선택에 찬성하고 지지를 보냈다. 겉으로 보기에 한국 사회는 평화를 사랑하고 전쟁을 반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무력을 사용할 때에는 아무런 거리낌을 갖지 않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아주 간단하게 한국인들의 ‘국민성’을 거론하면서 분열증적인 행태를 비판하면 모든 문제는 끝난다. 그러나 현실은 이보다 더 복잡한 것처럼 보인다. 문제는 한국 사회에 폭력에 대한 숭배 또는 경외심이 항상 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 사이에 양상은 다르지만 엄연히 폭력에 대한 숭배가 일정하게 잔류하고 있는 것을 부정하긴 어렵다. 여기에서 숭배의 대상이 되는 폭력은 개인의 폭력이라기보다 국가의 폭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쉽게 말해서, 한국인의 내면에서 국가라는 것은 ‘제대로 사랑을 받아볼 수 없었던 부모’ 같은, 부재의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존재하지만 부재하는, 또는 부재하기에 존재하는 것이 바로 국가이다. 일상에서는 나타나지 않다가 ‘국민’의 결여가 부각될 때, 국가는 홀연 유령처럼 호명 당한다. 이런 까닭에 한국의 정서에서 국가라는 범주는 ‘신성 폭력’이라는 벤야민의 개념에 정확하게 부합한다.

국가라는 대타자

    신성 폭력은 국가의 부재성과 무관하지 않다. 종교적 의미에서 신성 폭력은 죄를 범한 인간을 벌하는 신의 심판을 의미하지만, 근대성의 세속화는 이런 심판 자체를 부정하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역사는 폐허만을 남긴 채 ‘새로운 천사’의 저항 따위는 아랑곳없이 앞으로 나아가기만 한다. 부재하기에 존재할 수 있었던 신의 자리는 이제 국가라는 보이지 않는 대타자에게 위임된다. 이 대타자는 사회 구성원의 판타지이기도 하다. 제각각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들이 자신의 평등을 ‘요구’하는 대상이 바로 국가인 것이다.

    그렇다면 국가 폭력의 극치라고 할 수 있는 전쟁이란 무엇인가. 정치의 극단에 바로 전쟁이 있다. 칼 슈미트의 말이 옳다면, 정치는 평소에 드러나지 않는 적과 아를 선명하게 갈라 놓는 순간이다. 적과 아로 갈라진 갈등의 공간에 최후의 심판처럼 전쟁은 강림한다. 전쟁의 국면에 남는 것은 오직 폐허뿐이다. 이 과정에서 중간자는 있을 수가 없다. 회색분자도 반드시 적 아니면 아로 ‘분류’되어서 어느 한 쪽으로 낙인찍힌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전쟁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이중성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다. 과거 군사독재나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 전쟁은 국가권력을 장악한 ‘군인들’의 것이었다. 이 군인들은 군대라는 직접적 국가의 물리력을 운용할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따라서 이 당시에 전쟁이라는 것은 언제든지 개인의 권리를 박탈해갈 수 있는 절대 절명의 상황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당시 한국 사회는 일인에게 독점되어 있는 국가권력의 사용권을 금지시키는 것이었고, ‘민주화’라는 정치적 기획 또한 이 사용권을 제한하는 것을 과제로 삼았던 것이다.

    국가권력을 억압의 기제로만 파악하고, 거기에 저항하는 것이 곧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이라고 규정했던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 국가는 언제나 적과 동일시되는 것이었다. 경찰이나 군대는 냉혹한 폭력의 이미지를 띠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를 조롱하고 권력의 감시를 빠져 나가는 것이 영웅적 행동으로 비춰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에 이와 같은 상황은 변화에 직면하게 되었다.

    가장 주목할 만한 변화는 국가를 적으로 간주하지 않고 사회 구성원의 공통성을 실현시켜낼 수 있는 매개로 간주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 변화의 과정이 상징적으로 드러난 것은 2002년의 월드컵이었다. 월드컵은 애써 부정했거나 보이지 않던 국가를 선명하게 현시시키는 ‘실재의 응답’이었다. 물론 이 응답의 결과는 국가로부터 어떤 즐거움을 얻어낼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지금 한국 사회는 과거와 확연하게 구분할 수 있는 새로운 국면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는데, 탈권위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경향성으로 사회 구성원들의 감수성이 변해가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와중에서 국가는 이제 특정한 ‘권력자’의 것이라고 보기 어렵게 됐다. 국가를 부모처럼 느끼는 현상은 복지국가에 대한 요구와 무관한 것이 아니다. 어버이처럼 인민을 보살피는 국가라는 이미지는 자식을 키우는 어머니의 형상으로 공화국을 묘사했던 프랑스 혁명 이후의 상징화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한국 사회는 전쟁을 어떻게 사유하는가 

    전쟁은 이제 과거처럼 특정 정치세력이나 우파들의 전유물로서 이용당하는 수준을 넘어섰다. 안보를 팔아서 지지기반의 이탈을 막던 과거의 습속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이제 전쟁은 위험으로부터 자식(인민)을 지키는 국가(어버이)의 행동으로 새롭게 의미화한다. 한국 사회에서 발견할 수 있는 전쟁에 대한 이중적 태도는 이렇게 변화한 국가관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겉으로 보기에 이중적이긴 하지만, 내적 논리는 수미일관하다. 전쟁이 국가의 존립을 위협하고 중립지대를 사라지게 만드는 극단적인 전략이라면, 인질구출 작전 같은 것은 국가가 자식을 구하는 ‘영웅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쟁에 대한 한국 사회의 두려움 내지 거부는 정치를 쓸모없는 것으로 여기고 정치적인 것을 소음이나 소란으로 파악하는 탈정치적 보수주의를 드러내는 징후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을 돌려서 하면, 우파는 열심히 북한을 ‘주적’으로 존속시키려고 하지만, 실제로 현실에서 북한은 한국 사회 구성원들에게 더 이상 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적을 만들지 않겠다는 것은 근본적인 안정을 깨는 변화를 만들어내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소말리아 해적 인질구출 작전은 군사개입을 정당화했다는 점에서 앞으로 계속 지켜봐야할 중요한 계기이지만 동시에, 과거와 달리 국가권력이 직접 나서서 자국의 인민을 구출한다는 할리우드식 스펙터클이 이해관계의 재현체로서 국가를 끊임없이 요청하는 상황과 맞아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사회는 군사적인 행동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부정하거나 거부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안위가 위협받을 수 있는 한반도 내의 전쟁이다. 이 전쟁은 근본적인 삶의 조건을 폐허로 몰아넣을 수 있는 위험한 정치적 국면이다.

    앞으로 한국 사회에서 국가에 대해 자기 자신을 셈해주기를 요구하는 평등의 목소리는 더욱 커질 전망이다. 그러나 국가는 그 평등을 요구하는 개인을 상대하지 않는다. 국가는 오직 이해집단에 귀속해 있는 개인에 한해서 인지할 수 있을 뿐이다. 전쟁이라는 정치성의 폭발을 두려워하는 정서가 농후한 한국 사회에서 중성적 국가권력의 역할에 대한 요구는 점점 강렬해질 것이다. 한국 사회가 전쟁을 사유하는 방식은 결국 한편으로 전쟁 반대를 통해 정치적 부재를 인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 권력을 정당하게 사용할 수 있는 대의를 만들어야한다는 절박성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결과적으로 이런 문제는 공동체적 정의라는 문제와 함께, 복지국가에 대한 열망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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