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진걸 / 참여연대 사회경제국장

   평화! 평화는 매우 소중한 의미를 지닌 단어다. 평화(平和)라는 한자를 보면, 모든 것이 공평하면서 사람들의 입에 쌀(밥)이 들어가야 세상이 평화롭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자를 만든 당대 중국 사람들의 철학이 고스란히 들어간 것이다. 평화는 모든 사람들이 기본적인 의식주를 누리며, 세상이 공평하게 운영될 때 가능하다. 그렇지 않다면 평화는 깨지고 민중들은 분노하게 된다. 유일하게 도덕적인 전쟁은 인민들의 분노에 의한 전쟁, 즉 혁명밖에 없는 것이다. 영화사에서 불멸의 명작으로 꼽히는 <전함 포템킨>(감독 세르게이 M. 에이젠슈타인, 1925)의 첫 장면은 이렇게 시작한다. “지금까지 인류의 모든 전쟁은 부도덕했다. 유일하게 도덕적 전쟁이 있으니 그것은 혁명이다.”

    그런데 작금의 세계에서는 민중의 도덕적인 전쟁(혁명)이 아닌 제국과 권력자들의 부도덕한 전쟁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제국의 전쟁이 전 세계를 가장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제국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자신의 지위를 잃을까봐 안절부절하고 있는 미국이다. 그들은 9·11 테러 이후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두 곳에서 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것만 두 개의 전쟁일 뿐, 그들은 하나의 그릇된 목적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미국은 9·11을 빌미로 전 세계를 상대로 미국 편에 설 것인지 반대편에 설 것인지 양자택일을 강요하며, 세계의 주권 국가들에게 전쟁의 상대방이 될 것인지 아니면 깨끗이 미국에 협조할 것인지를 강요하는 것이다. 

불안의 세계화

    예전의 전쟁은 그래도 파시즘과의 전쟁, 이념 진영 간의 각축이라는 의미를 띠고 있었기 때문에, 보기에 따라서는 일정한 ‘명분’이라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적 차원의 전쟁은 오로지 ‘이권’을 위해 저질러진다는 점에서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예전에도 전쟁의 이면에 권력자의 이권은 늘 도사리고 있었지만, 최근의 전쟁들처럼 이렇게 욕망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적은 없었다. 이라크에서 벌어진 미국의 전쟁은 대량살상무기 때문이 아니라 석유 때문이라는 것은 이제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실제로 미국이 애초 개전의 당위성으로 내세웠던 대량살상무기는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고통 받은 이들은 대다수의 약한 민중들이며, 그들의 피로 이익을 본 자들은 몇몇에 지나지 않는다. 코피아난 전 유엔 사무총장은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전쟁을 국제법상 불법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여기서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그렇다면 과연 세계의 경찰을 자처하고 있는 미국이 주도한 세계적 차원의 전쟁이 세상을 더욱 안전하게 만들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명분도, 의미도 없는 전쟁 속에서 오로지 이권에 의해 다른 국가들의 주된 권리가 유린당하고 있다. 또한 수없이 많은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하자 그 전쟁의 당사자에 대한 민중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게 커졌다. 게다가 이 전쟁과 대결의 배후에 있다고 여겨지는 기독교 배타주의적 권력자들의 종교적 편견까지 겹쳐져 이슬람에 대한 비관용적인 태도가 지속되고, 그것이 순교자들의 저항을 촉발하면서 세상은 더욱 불안해지고 있다.

 

    세계 곳곳에서는 끊임없이 무력 저항행위가 벌어지고 있다. 세상은 더욱 공포스러운 곳으로 변했고, 테러에 대한 위험은 미국에 줄을 선 모든 국가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지금 인류는 한편으론 환경위기로 인한 재앙에 시달리고 있고, 또 한편으론 미국이 주도한 ‘불안의 세계화’로 안해 고통받는 처지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그렇지만 이 와중에도 전쟁이 필요악이라고 주장하는 이들, 미국 중심의 세계에서 미국에게 협력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하는 이들, 그게 이라크든 이란이든 북한이든 악의 축과는 전쟁을 불사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러한 시각은 매우 단편적인 것이다. 이러한 것은 단기적인 이익만을 고려하는 생각 짧은 행동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나 그러한 생각을 하는 이들이 담보로 하고 있는 것이 우리 모두의 안전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작은 것을 탐하다가 많은 소중한 것들을 잃게 될 가능성이 있다. 세상에 좋은 전쟁은 존재하지 않으며 나쁜 평화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곧 전쟁은 우리가 최대한 배제해야 하는 것이며 반대로 평화는 우리가 지향해야 할 당위인 것이다.

    전쟁은 필요악이 아니라 무고한 생명을 앗아가는 절대적인 악에 불과하다. 어떠한 재앙도 전쟁보다 더한 것은 없다. 또 미국 중심의 세계는 이제 더 이상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한반도에서의 전쟁은 인구의 집중과 지리적·산업적 특성 상 무고한 민간인의 피해가 매우 클 것으로 예상된다. 때문에 우리는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어떠한 일체의 무력행위도 철저히 예방하고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지구적 차원의 평화 네트워크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 하지만 생명을 무참하게 스러지게 만드는 전쟁과 폭력이 이 세상엔 아직도 많이 발생하고 있다. 이제는 전쟁의 시대, 폭력의 시대를 종식하고 평화의 시대, 사랑의 시대로 나아가야 한다. 이를 위해 인류는 무엇을 해야 할까. 21세기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가 바로 ‘NGO의 시대’라는 것이다. 세계적 차원에서, 그리고 지역적 차원에서의 결사가 확대되고, 시민들의 능동적 정치참여가 고조되면서 이제 세계는 ‘시민의 힘에 바탕을 둔 참여민주주의’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바로 이성에 호소하는 시민의 힘으로, 세계시민주의라는 평화의 무기로, 전 세계적 차원에서의 전쟁과 폭력을 반대하는 평화의 동맹으로 이 살벌한 전쟁의 위협을 끈질기게 근절해 나가야 한다.

    실제로 전세계의 시민사회운동, 비정부·비영리 기구 활동의 주요한 내용이 바로 반전 운동과 평화 운동이다. 세계 곳곳의 주요 도시에서 많게는 수백만 명의 시민들이 전쟁과 폭력을 반대하며 평화를 지키자는 물결에 동참하고 있다. 오랜 분단과 냉전에 시달리고 있는 이 땅 한반도에서도 ‘연평도 사태’를 겪으면서 사람들이 다시 한 번 평화의 소중함에 눈뜨고 있다. 전쟁에 대한 걱정과 불안이 시민들을 위협하면서, 평화를 위한 정치적 노력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게 하고 있다. 그런 시민들의 절박함과 깨달음은 2010년 6월 지방선거 때 “1번 찍으면 전쟁, 2번 찍으면 평화”라는 간명하면서도 기괴하기까지 한 슬로건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국민들을 우습게 알고 민주주의와 상식을 파괴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남북관계와 한반도 평화까지 무참하게 파괴하는 것을 보면서 국민들은 현 정권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명박 정권이 한반도에서는 ‘평화가 행복, 평화가 경제’라는 사실을 무시한 대가를, 우리 국민 모두가 대신 혹독하게 치르고 있다.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사회 지배층이나 위정자들의 책임이다. 그러나 실제로 가장 크게 피해를 보는 것은 평범한 시민들이다. 특히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자일 수 밖에 없는 청년들은 누구보다 먼저 전쟁을 반대해야 한다. 절대적으로 소중한 생명과 평화를 지키기 위해 직접 행동에 나서야 할 때다. 나와 사랑하는 사람들의 목숨을 위해, 전쟁을 반대하기 위해 우리가 행동해야 한다. 권력자의 어리석음과 추악한 이권추구로 젊은 벗들이 무참히 쓰러지고 민간인들이 희생당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당사자인 청년들과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나서 전쟁을 종식시켜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평화를 위한 첫걸음이다.

    이 세상은 지금 더 많은 평화와 더 많은 비폭력이, 그리고 더 많은 시민들의 저항과 결사가 절실하다. 국가 차원에서의 전쟁과 폭력을 억제하는 시민들의 행동과 세계적 차원에서의 평화를 갈구하는 시민들의 행동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지구적 차원의 평화 네트워크로 작금의 위기를 종식시켜 나가야 한다. 바로 지금 평화를 위한 결사와 행동에 최소한의 관심으로 함께 하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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