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학교 대학원신문
인터뷰, 임근준
최종편집 : 2020.10.9 금 13:00
기획학술
윤리로서의 관용이종찬 / 영어영문학과 박사수료
신의연 편집위원  |  destinyu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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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7호]
승인 2011.03.02  15:5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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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 : 다문화제국의 새로운 통치전략>, 웬디 브라운, 갈무리
학문적 담론의 역사에는 진화 대신 순환이 있는 것이 아닌가 돌이켜보게 된다. 웬디 브라운의 <관용:다문화제국의 새로운 통치전략>을 읽으며 비슷한 생각을 했다. 한때 이 땅에 다문화주의, 차이, 다양성 등 신자유주의 탈정치화 담론들이 유행처럼 휩쓸던 적이 있었는데 관용 담론 또한 결국엔 앞서 언급한 담론들의 진화라기보다는 그 연장선상, 심하게는 답습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다. 저자 또한 한국어판 서문에서 이를 염두에 둔 듯한 말을 남기고 있다. “오늘날 관용이 차이의 윤리적 중개인이자 해결책으로 격상된 것은 이러한 차이의 물화를 배경으로 한다.” 차이 담론이 그 ‘약발’을 다 한 것 같으니 새로운 대중 통제도구로 관용 담론이 소환돼 오기에 이른 것 아니냐는 것이다.

웬디 브라운은 <관용>에서 이제까지의 관용 담론이 작금의 온갖 불평등과 갈등의 포장술로, 또 제국주의적 착취의 정당화 기술로 오용되어 왔음을, 그리하여 종국에는 대중을 탈정치화시키고 있음을 고발하고 있다. 조종간에는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가 자리 잡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러므로 이때 관용은 명백히 사이비 관용이다. 관용의 핵심은 여하한 차이성에 대한 인정 및 공존에 있으므로 원칙대로라면 특정한 개별적 정체성을 옹호 또는 배척할 수 없다. 그러므로 관용 담론은 이론상 자기부정성을 필연적으로 내재해야만 한다. 그러나 서구문화에서 자아정체성이 포기할 수 없는 최종방어선이었다는 점에서 관용 담론의 위선은 적나라하게 폭로된다. 서구인의 이 같은 자아 중심적 사고의 기원에는 칸트의 자율적인 자유주의적 주체가 자리 잡고 있다. 프로이트 또한 마찬가지다. 그에게는 개인의 리비도만이 존재했다. 본능을 억압하는 문명의 제단 앞에서 희생된 개인만이 프로이트에게는 ‘존재론적 선험이자, 동시에 문명의 목적’이었다.

저자는 ‘개인의 윤리로서의 관용’과 ‘정치적 담론이자 통치성으로서의 관용’을 구분하고 있다. 개인의 윤리로서의 관용은 “친구의 불쾌한 웃음소리나 학생들의 거슬리는 복장, 동료의 종교적 열정이나 낯선 이의 불쾌한 냄새, 옆 집 정원의 너저분함 같은 것들”을 관용할 수 있는 차원의 문제라고 한다. 하지만 ‘윤리’라는 말이 못내 걸린다. 관용의 프레임이 윤리의 문제를 포괄하기에는 아무래도 충분치 않아 보이는 것이다.

상술한 사례들은 윤리라기보다 모럴, 즉 도덕의 문제에 보다 적합해 보인다. 모럴은 결정의 순간 앞에서 가치, 즉 판단의 문제에 천착한다. 공동체적 규범이라는 모범답안이 이미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리는 다른 길을 간다. 자신의 행위에 대해 끊임없이, 기존의 규범에 따라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서,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극장전>(감독 홍상수, 2005)에서 동수(김상경)는 이렇게 말했다. “생각을 더 해야 해, 생각만이 나를 살릴 수 있어, 죽지 않게 오래 살 수 있도록.” 생각을 거듭한 뒤 윤리적 주체는 ‘어떤’ 결단을 내린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것을 행위로 옮긴다. 중요한 건 그 다음이다. 그는 얼마든지 ‘다시!’(앙코르!)를 외칠 것이다. 다음번에도, 또 그 다음번에도. 이를 두고 윤리적 ‘반복’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올드보이>(감독 박찬욱, 2003)에서 이우진(유지태)은 오대수(최민식)에게 섬뜩하지만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누나하고 나는 다 알면서도 사랑했어요. 너희도 그럴 수 있을까.” 물론 ‘앎’의 목적어는 근친상간이다. 이우진과 이수아(윤진서)의, 그리고 오대수와 미도(강혜정)의 근친상간이라는, 하나의 ‘사건’.

오이디푸스와 오대수에게는 놓치지 말아야 할 핵심적인 공통점이 하나 있다. 그들 모두 자신의 행위에 기꺼이 ‘책임’을 졌다. 오이디푸스와 오대수는 선택 혹은 결단의 순간에 각각 제 두 눈과 혀를 ‘스스로’ 벌한 뒤, 모든 권력과 영광을 뒤로 하고 테베를 떠났으며 또 기억을 말소시켰다. 그러니 어떤가. ‘관용’의 미덕을 발휘해 한없는 아량으로 이들을 감싸 안아야 할까. 우리의 (항상적으로) 불완전한 현실 공동체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다. 설사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 순간 우리의 문명은 정신분열증의 단계로 추락 혹은 초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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