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현 / 홈리스행동 집행위원장

인권의 개념이 확장 되고 인권의 가치를 존중하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반면 인권을 누릴 수 있는 조건이 무엇보다 소유하고 있는 ‘자본’의 크기로 노골화되고 있다는 점도 부정할 수 없다. 어떤 이는 고상하게 살 권리를 인권의 이름으로 주장하고 다른 이는 밥, 집, 잠과 같이 권리라 부르기에도 민망한 것들을 염원해야 하는 분리. 이것이 한국 인권의 실상일 것이다. 탈정치화된 인권의 확산, 그것은 모두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이런 현실에서 홈리스 인권의 소멸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권리로부터 배제된 사람들


홈리스 상태로 진입함과 동시에 작용하는 정부의 정책적 개입은 아이러니하게도 인권의 보장이 아닌 침해로 시작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주민등록제도가 있다. 국민등록제로서의 주민등록제도는 거주지를 중심으로 생성, 소멸하기 때문에 주거상실은 곧 국민등록 해지의 효과를 나타낸다. 국민이면 누구나 최저생계를 보장받을 수 있게 하겠다고 제정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조차 거처가 없어 국민등록이 해지된 거리 홈리스들에게는 장벽을 치고 있다. 너무나 가난하기에 한뎃잠을 자야 하는 게 거리 홈리스임에도 집이 없다는 이유로 최저생계도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이 발생하는 것이다. 투표권과 같은 정치적 권리는 말할 나위도 없다. 이처럼 주민등록제도는 국가 통제기제라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홈리스와 같은 극단적 빈곤계층에 대한 배제를 전제한다는 점에서도 비판되어야 할 것이다. 몇 년 전, 한 여성 홈리스가 10여 년 만에 주민등록을 복원한 후 기쁨에 겨워 필자에게 한 말은 충격적이었다.  “삼촌…… 나 오늘, 사람 됐어” 이렇듯, 주거지 유무를 기반으로 한 주민등록은 홈리스들에게 있어 제도적인 폭력을 넘어 인간으로서의 자기 부정을 강요하는 것이기도 하다.

홈리스에 대한 또 다른 측면의 국가폭력은 범죄화의 방식을 취한다. 작년 1월, 서울역 역무원과 공익근무요원이 즉각적인 후송이 필요한 거리 홈리스를 철도역사 밖으로 내몰아 사망을 방조케 한 사건이 사회적인 주목을 받은 바 있다. 그러나 이들의 행위는 법원에서 무죄임을 인정받는다. 철도안전법이 ‘역 시설 또는 철도차량 안에서 노숙하는 행위’를 질서위반행위로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빈곤 문제로서의 ‘노숙’을 범죄화하여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이다. 뿐만 아니라 홈리스에 대한 범죄화는 ‘노숙 자율 금지구역’ 지정이나 군 전역자들로 구성된 ‘노숙인 순찰대’ 운영과 같은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런 방식은 공통적으로 공공 공간에서 홈리스들을 몰아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철도역, 지하철역, 공원 등과 같은 홈리스들의 거처는 선택이 아닌 생존을 위한 마지막 보루이기 때문에 홈리스 퇴거를 위한 행정과 홈리스들의 마찰은 불거질 수밖에 없다. 또한 이 과정에서 홈리스 사망을 비롯한 인권 침해 문제가 발생하는 것도 필연적이다. 유일한 해법은 홈리스 생활인들에게 공공 공간보다 나은 주거복지 차원의 선택지를 주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철도, 지하철과 같은 공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이행하려는 전향적 태도 역시 필요하다. 역사 민자화, 민영화를 통해 공공 역사를 상업 자본에게 양보하는 아량의 백분의 일만 발휘한다면 홈리스들의 인권 보호와 공공 역사의 제 기능 찾기는 확연한 성과를 보게 될 것이다.

또한 거리 홈리스들에게 가해지는 범죄와 착취도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지난 18일 밤, 서울역에서 만난 한 거리 홈리스는 승선표를 내보이며 이렇게는 못 살겠다고 억울함을 토로했다. 사정을 들어보니 직업 알선 브로커가 지적장애인인 그를 속여 35만원을 받고 염전으로 넘겼고, 다행히도 그다지 사납지 않은 주인을 만난 덕에 그는 간신히 되돌아 올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돌아온 곳은 다시 서울역이었다.

노동 착취나 인신매매와 같은 전통적 범죄가 근래 들어 많이 사그라지는 추세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거리 홈리스들을 대상으로 한 범죄는 심화됐고, 유형 역시 진화해 최근에는 금융을 매개로 한 파생 범죄들이 극성을 부리고 있다. 통칭 명의도용 범죄들이다. 5년 전 거리 홈리스들을 대상으로 범죄피해에 관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거리 홈리스의 1/4은 명의도용 범죄피해를 겪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거리 홈리스의 노동력, 인신을 억류해서 얻게 되는 이윤보다 신용을 창출하고 이를 가공하여 이윤을 챙기는 것이 훨씬 파이가 크기 때문이다. 이윤율 저하라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를 지연시키기 위한 핵심 장치인 금융의 극단적 부작용을 다름 아닌 홈리스들, 자본주의에서 철저하게 배제된 집단이 떠안고 있는 형국인 것이다. 물론 명의도용 범죄 피해에 대해 홈리스들의 책임성을 묻는 반론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홈리스 상태에 처한 이들은 과거 주로 1차 산업에 종사했던 이들이거나 낮은 교육수준 등의 이유로 복잡한 금융 메커니즘에 무지한 이들이 대다수다. 범죄에 대한 인식이 있다 하더라도 한 달 쪽방 값, 용돈, 취업 등의 미끼가 뿌리치기 어려운 제안인 것도 사실이다. 반면 거리 생활을 벗어나도록 돕지 못하는 노숙인 지원체계, 거리 홈리스에 대한 치안공백의 책임은 어디서도 제기되지 않고 있다.

‘홈리스에게 인권은 있는가.’ 그에 대한 대답은 언어가 아닌 실천이어야 할 것이다. 홈리스도 인간이기에 인간다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명제는 홈리스 상태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과 그에 기반을 둔 사회의 역할을 구체화함으로써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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