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명 / <프레시안> 국제분쟁전문기자

2,400년 전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그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이렇게 기록했다. “전쟁은 일상적인 시민 생활의 규범을 혼란 속으로 몰아넣을 뿐 아니라, 법과 정의의 이념을 제쳐놓고 우리 인간의 본성을 공격적이 되도록 만든다.” 희랍 문명의 꽃을 피웠던 아테네 시민들이 전쟁의 광풍에 휩싸이는 것을 지켜보면서 투키디데스는 우리 인간의 공격적 본성에 깊은 절망감을 느꼈다. 그런 모습을 우리는 21세기의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본다.

어떤 경우를 전쟁이라 규정할 것인가를 두고 지금껏 전쟁 연구자들은 여러 다양한 개념들을 내놓았다. 전쟁연구자 퀸시 라이트는 참전 병력 규모에 초점을 맞춰 “양쪽 전쟁 당사국의 군사력이 10만 명 이상 참전했을 경우”를 전쟁이라고 정의 내렸다. 또 다른 전쟁연구자 루이스 리처드슨은 전사자에 초점을 맞춰 그 나름의 계산 방식에 따라 “전투에서 316명 이상이 사망한 경우”를 전쟁이라 보았다. 가장 보편적으로 많이 받아들여지는 전쟁 개념은 ‘1년 동안 1천 명 이상의 희생자를 낸 적대적 행위’이다. 이 정의는 미국 미시간대학교가 1960년대부터 진행해온 전쟁관련요인(COW) 프로젝트가 설정한 것이며, 실제로 많은 전쟁연구자들이 이 정의에 따라 전쟁연구를 진행해오고 있다. 교전 쌍방의 전사자를 모두 합친 ‘1천 명 이상의 전쟁희생자’ 속에는 전투원은 물론 비전투원인 민간인도 포함된다.

전쟁과 군비·군사 분야 연구에서 세계적인 권위를 지닌 스웨덴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SIPRI)가 해마다 발표하는 <군비·군축·국제안보 연감> 2010년판에 따르면, 21세기 들어 ‘1년 동안에 1천 명 넘는 희생자’를 낳은 전쟁이 해마다 15건 넘게 벌어지고 있다(2009년 17건, 2008년 16건, 2007년 14건, 2006년 17건, 2005년 17건, 2004년 19건, 2003년 19건, 2002년 21건, 2001년 24건, 2000년 25건).
21세기의 전쟁들은 국가끼리의 국제전보다는 주로 내전의 양상을 보인다. 2003년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한 다국적군이 이라크에서 전쟁을 벌인 것이나, 서남아시아의 인도·파키스탄 두 나라가 영유권을 둘러싸고 만성적인 분쟁을 벌여온 카슈미르, 그리고 이스라엘의 식민통치에 맞서 싸우는 팔레스타인의 경우를 빼면 대부분이 내전이다.  

앞의 SIPRI 전쟁 통계로 미뤄보면, 앞으로 몇 년 동안에도 1천 명 이상의 희생을 낳는 전쟁들이 해마다 15건 안팎으로 이어질 것으로 예측할 수 있다. 여기서 ‘이어진다’는 표현을 쓴 것은, 없던 전쟁이 새로 터진다는 것이 아니라 지난해 벌어졌던 전쟁이 해가 바뀌어도 계속된다는 뜻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점 하나는 세계 곳곳에서 정치적 폭력과 굶주림으로 고통 받는 이들에게 ‘1년 동안에 1천 명 넘는 희생자’를 전쟁으로 보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지구촌 분쟁의 실상을 들여다보면, 사망자 숫자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지역적으로 전쟁이 주는 고통의 편차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우리가 두 발을 딛고 사는 한반도 역시 세계적인 분쟁지역 가운데 하나다. 그래도 한반도는 다른 분쟁지역에 견준다면 상황이 나쁘지 않다. 쓰는 말과 문화적 뿌리가 같은 민족이기에 마음을 열고 대화를 나눌 수도 있다. 21세기 세계 분쟁지역들을 돌아보면, 언어·혈연·종교·정서가 다른 정치세력들의 경우 서로에 대한 미움과 불신의 골을 메우기가 쉽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중동지역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이나 발칸반도의 보스니아, 아프리카의 수단, 콩고 등은 한정된 영토와 자원을 둘러싼 이민족끼리 다투면서 언어소통에서조차 어려움이 따랐다. 이곳들은 겨우 전쟁의 불길이 꺼졌다 해도 언제 또 다른 불길이 치솟을지 모르는 곳들이다.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의 전쟁보다 더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21세기의 유혈투쟁들은 투키디데스가 절망했다는 ‘인간의 공격적 본성’만 가지고는 설명이 안 되는 복합적인 여러 요인들(이를테면 석유를 비롯한 자원 탐욕, ‘세계정부’가 없는 무정부적 국제체제, 전쟁이 터지기를 은근히 기다리는 군수회사를 비롯한 어둠의 세력 등)이 깔려있다. 21세기 지구촌 평화기상도는 ‘흐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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