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정 /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북한여성의 지위와 관련하여 남한의 학계나 여성운동 진영에서는 두 가지 상반된 의견이 존재해 왔다. 북한사회의 일상을 파악하기 어려웠던 시절, 제도나 지배담론을 중심으로 이 문제를 사고했던 이들은 적어도 남녀평등의 실현이라는 측면에서 만큼은 북한이 남한보다 앞서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남북교류가 활성화되고 북한 출신 이주민이 증가해 북한의 일상에 대한 구체적 정보가 알려지게 되자 이러한 이상화 담론은 도전받기 시작했다. 오늘날 북한여성의 무겁고 불평등한 삶은 종종 북한 지배담론의 허구성을 드러내고 북한의 후진성과 반인권성을 상징하는 대표적 예로 소개되곤 한다. 전자는 제도와 일상의 간극에 주목하지 않고 과거로 현재를 설명하려 한다는 점에서, 후자는 현재로 과거를 재단하며 행위자성에 주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북한의 모순적 여성정책

북한의 여성관련 법제를 살펴보면 북한여성들은 남성과 동등한 정치·경제·사회적 권리를 누리도록 되어 있다. 북한의 법률 및 공식적인 제도에서는 가부장제를 지지하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북한의 ‘성평등적’ 여성정책은 해방 이후 공식적으로 국가가 수립되기 전부터 활발하게 이뤄졌다. 북한은 1945년 11월 북조선민주여성동맹을 창립하고, 여성의 노동력을 남성과 같이 인정하고 동일한 면적의 토지를 분배한다는 원칙을 담은 ‘북조선 토지개혁에 관한 법령’(1946년 3월)을 제정했다. 같은 해 6월에는 ‘북조선 로동자 및 사무원에 관한 로동법령’을 제정하여 출산전후 유급휴가 규정과 산후휴가에 이르는 기간 동안 중노동 금지 규정을 통해 모성보호에 필요한 조항을 만들었으며,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과 시간 외 노동 및 야간 노동 금지를 도입하는 등 노동과정에서의 불평등을 방지하는 조항을 만들었다. 이어 7월에는 ‘북조선 남녀평등권에 관한 법령’을 제정해 여성이 모든 영역에 있어 남성과 같은 평등권을 가졌음을 천명하고 남성과 같이 각급 공직을 맡을 권리, 재산 및 토지 상속권, 이혼 시 공동소유 재산과 자기 몫의 토지에 대한 분배를 청구할 권리 등을 구체적으로 명시했다. 이는 봉건적, 제국주의적 질서 안에서 여성의 권리가 전혀 보장되지 않았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면 그야말로 ‘혁명적’ 변화였으며, 1987년 ‘남녀고용평등법,’ 1990년 ‘재산분할청구권’등이 신설돼 남한과 비교해 볼 때도 선구적 조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여성의 지위 향상과 관련한 북한의 정책적 조처는 여러 맥락에서 찾을 수 있다. 남한의 국회의원에 해당하는 북한의 최고인민위원회의 경우 여성의원의 비율이 1948년 1기 대의원 구성 당시 12.1%였고, 1998년 10기가 되면 20.1%에 이른다. 이는 정부 수립 이후 줄곧 2-3%를 넘지 못하다가 2000년 16대에 이르러 겨우 5.9%를 점한 남한여성 국회의원 비율과 크게 비교되는 수치다. 경제적 측면에서도 북한은 여성의 노동권을 보장하고 이를 지원하기 위해 가사노동 및 아동양육의 사회화를 위한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앞서 언급한 ‘로동법령’ 외에도 1949년 ‘탁아소에 관한 규정’, 1976년 ‘어린이보육교양법’을 제정, 탁아소와 유아원 등의 설립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남한은 1987년에 이르러 ‘남녀고용평등법’을 제정하고 1991년 ‘영유아보육법’을 제정했다. 교육의 경우에도 북한은 1975년 이후 유치원 상급반부터 고등중학교까지 11년제 무상의무교육제도를 시행하여 남녀 모두 균등한 교육을 받을 기회를 제공해 왔다. 비슷한 시기 남한의 여성 중등교육 수혜율은 남성보다 훨씬 낮았다. 이러한 요소들을 고려해 볼 때, 해방 이후 1970년대까지 북한사회는 여성정책의 측면에서 진보적 요소들을 상당히 많이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정책들이 여성을 사회적 노동에 참여시켜 사회주의 국가 건설에 이바지하게끔 하기 위한 정책이라는 혐의로부터 자유로울수는 없지만, 봉건적 억압에 시달리던 여성들에게 환영받을 만한 정책이었고 따라서 여성의 적극적 참여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북한의 여성 정책들은 그녀들에게 ‘혁명적 노동자’로서의 새로운 사회적 지위와 역할을 부여했지만 전통적 부덕을 지닌 ‘아내이자 어머니’로서의 여성상 또한 끈질기게 존재해 왔다. 여성에 대한 이러한 이중적 요구는 북한의 사회주의 체제가 어느 정도 안정화되고 김일성 유일체제와 부자세습이 도모되기 시작하는 시점에서 훨씬 더 강화됐다. 이에 따라 북한여성은 사회주의 건설 현장의 일꾼에 더하여 집안일과 자녀양육을 책임지는 역할도 함께 수행해야만 했다.

   일상생활의 측면에서는 가정, 직장, 사회 모두 남성우대 문화가 잔존해 있었다. 가정에서의 남아선호 사상은 여전했으며, 부부관계에서도 여성의 순종이 당연시 됐고, 맞벌이를 하는 경우에도 가사일은 여성의 몫이었다. 즉, 여성 또한 공적 노동의 장에서 활동했음에도 가정은 여전히 여성의 영역으로 간주되었고, 많은 여성들은 사회적 노동과 가사노동을 병행하는 ‘슈퍼우먼’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했다. 직장이나 각종 조직에서도 남성에 대한 우대가 일반적이었다. 취업과 직장 관련 성차별은 직종간의 불평등과 임금격차로 나타났다. 여성들은 남성보다 상대적으로 중요도나 임금이 낮은 직종에 배치됐으며 여성 조직을 제외하고는 어떤 조직의 수장이 여성이 되는 경우도 드물었다. 같은 조직원들 사이에서도 돌봄이나 서비스에 관련되는 일은 여성의 몫이었다. 
  
생계를 위한 경제활동과 가사노동

   1990년대 이후 지속된 경제난과 식량난은 여성들의 생활에 변화를 가져왔다. 원자재와 전력이 부족해 공장이 가동하지 못하게 되자 국가로부터의 배급이 끊기거나 부족하게 됐다 따라서 가정의 생계는 가족 구성원이 스스로 책임져야 했다. 그런데 당국이 주민들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하기 위해 남자들의 직장출근을 강요한 데다, 가정을 돌보는 일은 여성의 일이라는 성역할 의식, 남성이 장사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사회적 통념 때문에 여성들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경제활동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북한여성의 경제활동 중 가장 보편적인 형태는 장사다. 여성들은 소량의 음식과 생활용품을 가지고 장마당에 나가 장사를 하거나 공산품이나 지역 특산물을 가지고 이 지역 저 지역 다니며 ‘행방’을 한다. 중국과의 국경 근처에 사는 여성들은 중국 상인들과 밀무역을 하기도 하며, 아예 중국을 왕복하며 장사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활동이 이들 여성들을 가사노동에서 해방시켜 주지는 않는다. 일부 특권층 여성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북한여성들은 가족의 생계를 위한 경제노동에 더하여 온갖 가사노동을 책임지고 있으며, 특히 경제난으로 인해 가사노동 및 양육의 사회화를 위한 기관 및 조치들이 제대로 운용되지 못하면서 막중한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또한 경제활동 과정에서 체포, 구금 등 신분상의 불안과 성폭력 등의 위험에 시달리기도 한다.

   한편, 경제난과 식량난에 따른 여성의 경제활동 증가는 북한 가정에서의 가부장권에 대한 도전의 계기로 작동하기도 한다. 앞서 논의한 것처럼 북한 가정에서의 부부관계는 남편 중심의 수직적 관계다. ‘세대주’로서의 남편에 대해 여성은 종속적이자 보조적 위치에 있다. 그러나 식량난 이후 남성들이 경제적으로 무능해지고 여성들이 생계유지를 떠맡게 됨에 따라 가정에서 여성들의 발언권이 강해지고 남편들이 일부 가사노동을 분담하는 등의 모습이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북한 사회 전체의 남성중심 가부장적 생활의식, 성역할 분업구조 등을 약화시킨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남편을 ‘낮전등’(쓸 데 없다는 뜻에서), ‘멍멍이’(집 지키는 일만 한다는 뜻에서) 등으로 부르며 희화화하는 여성들도 ‘나도 남편 잘 만나서 이런 일을 하지 않고 살면 얼마나 좋겠냐’는 바람을 표현하며, 많은 여성들은 폭력적인 남편을 ‘세대주’로 받들며 살아가고 있다. 여성들의 경제력 및 이동성 증가, 이에 수반한 외부 정보에 대한 노출 등이 북한 여성들의 의식을 어떻게 바꾸어 놓을지, 그리고 이러한 변화가 북한사회 변화에 어떤 영향을 줄지 장기적인 관찰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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