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신규 / 한국문화정책연구소 이사

 

 

 

 

 

 

 

 

 

 

 

 

 

 

 

 

 

 

 

 

 

 

 

 

 

 

 

 ‘개인의 가난은 국가도 막을 수 없다’는 말이 있다. 다양한 사회복지정책이 만들어졌지만 근본적인 가난의 문제는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예술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십년 이상 무명 예술가로, 혹은 예술매개자로 일하면서 느낀 것은 예술가가 특별히 가난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다른 세상과 마찬가지로 가난한 예술가와 부유한 예술가가 있을 뿐이며, 단지 가난한 예술가들이 부유한 예술가들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는 것 뿐이다.
  그런 점에서, 예술가가 가난하기 때문에 지원해줘야 한다는 식의 논리는 곤란하다. 다만 사회 일반의 복지 수준이 향상되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술인들의 복지문제 역시 획기적으로 개선될 필요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몇 해 전 故구본주 조각가 측과 삼성화재와의 분쟁에서도 드러났듯이 예술가의 범주에 들어가는 일군의 시민들에게 정당한 법적 지위와 사회적 안전망을 보장해 주는 정책적 지원은 매우 필요하다. 예술노동의 사회적 가치를 인정받게 만드는 작업 또한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이런 예술인 복지문제의 제반 과제들은 전반적 사회복지 향상과 발맞춰 진행돼야 하며 국가적 예술지원과는 어느 정도 별개로 사고될 필요가 있다. 예술지원은 예술인들의 생계를 보장해주는 문제가 아니라 예술 자체의 발전과 사회의 문화적 환경개선을 위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예술지원의 역사

 


 국가를 포함해, 예술에 대한 사회공동체의 지원은 언제나 존재해왔다. 물론 시대적 환경에 따라 그 목적이나 방향의 차이는 있었지만 말이다. 예술에 대한 사회공동체의 지원은 소위 현대사회가 시작되기 이전에 오히려 강하게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예술가와 사회공동체의 관계맺음 방식의 차이 때문이다. 현대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자리잡기 이전, ‘개인적 예술’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자신이 소속된 사회공동체를 위한 예술을 했다. 궁정예술가나 종교예술가와 같이 지배계층을 위한 예술을 했던 엘리트 예술집단이나 백성들을 위한 예술을 했던 민중예술가들이나 자신들이 근거지로 삼고 있는 사회집단을 위한 예술을 했다는 점에서는 대동소이하다. 그들의 창작이나 연행은 철저히 공동체의 취향에 종속되어 있었다. 예술가들에게 창작의 자유가 주어진 것은 안정적 후원자들의 품을 떠나 시장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시점, 그러니까 모든 사회적 재화의 유통이 화폐를 매개로 하기 시작한 자본주의적 근대 이후부터다.
  주지하다시피 근대 이후 예술가들에게 주어진 시장은 기회의 옥토인 동시에 차가운 황무지였다. 시민계급의 성장 속에서 예술가들은 보다 자율적인 창작이 가능해진 듯 보였고, 과거에는 누리기 힘든 경제적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예술마저도 시장에 종속되는 상황이 마련됐다. 예술이 갖고 있는 미학적 가치와는 무관한 시장에서의 교환가치가 생성됐고 대부분의 영역과 마찬가지로 심각한 부익부 빈익빈 구조가 만들어졌다. 근대 예술 초창기에 만들어졌던 ‘당대 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가난한 천재예술가의 비극’이라는 이미지는 이런 예술과 사회의 관계맺음의 급격한 변동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후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국가적인 차원에서 예술지원에 대한 필요성이 인정받게 됐다. 예술지원에 대한 다양한 이론적 근거 중 가장 흔하게 제시되는 것은 예술이 갖고 있는 시장실패적 요소와 공공재로서의 가치다. 하지만 큰 틀에서 이런 전제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과연 어떤 예술지원이 효과적이고 정당한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는 누구나 만족할 만한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예술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가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개별 장르나 작가의 문제로 접근해 들어가면 이런 관점의 차이는 더욱 두드러지게 된다. 반드시 국가적 지원과 혜택을 받는 예술이 훌륭한 예술로 사후평가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결국 예술지원이란 지원기구가 지향하는 미래 문화예술의 비전과 밀접한 연관을 갖게 된다. 그런 점에서 국가적 예술지원은 검열적 속성이라는 위험요소를 내재하고 있다.

                                                    모든 전위예술은 불온하다


 최근 우리사회에서 예술지원정책의 트랜드는 상당부분 시장논리에 종속되어 있는 듯 보인다. 선택적이고 집중적인 지원을 통해 국제적으로 경쟁력 있는 예술작품과 예술가를 배출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기업 육성책, 혹은 엘리트 스포츠 집중지원의 논리와도 유사해 보인다. 일련의 스타 프로젝트를 통해 세계적으로 경쟁할만한 예술가들을 길러낼 수 있다는 발상은 문화예술의 공공성에 대한 고려가 배제되어있다는 비판을 제외하고라도, 성공 가능성 자체가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다. 근대 이후 예술이 가져왔던 고유한 특성이 고려되지 않은 산술적 계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대의 미학적 경향을 혁신시키고 새로운 예술의 전범으로 인정받게 되는 성취들은 당대의 지원으로부터 완전히 소외된 상태에서 창조되는 경우가 빈번했다. 지원은 커녕, 지배집단과의 불화 속에서 미학적 가치를 창출한 경우가 더 많았다. 세르반테스는 창작지원공간이 아닌 감옥에서 ‘돈키호테’를 구상했다. 미학적 입장에서 ‘진정한 예술’은 기존의 사회질서에 대한 의심에서 싹트며 지배 이데올로기와 대립, 긴장을 이루는 지점에서 생성된다. 시인 김수영이 남긴 ‘모든 전위문학은 불온하다’는 전언은 예술이 갖고 있는 근본적 전복성을 탁월하게 지적해낸 것이다. 어찌보면 이러한 전복성이야말로 오히려 예술이 사회공동체에 기여하는 가장 큰 요소다. 예술은 답답한 현실이 잉태하는 사회불만 요소를 상상의 영역에서 해방시킴으로써 개인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는 역할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신정권 시대의 새마을운동 홍보영화나 북한 예술작품처럼 지배 집단의 프로파간다가 노골적으로 표현된 국책예술작품에서 재미나 미학적 쾌감을 느낄 수 없는 것은 이런 점에서 당연한 일이다.
 국가 기구의 예술지원에 내재된 검열적 속성은 예술이 갖는 근원적 전복성과 충분히 충돌할 수 있다. 때문에 예술지원 구조와 사회문화정책이 선진화된 국가일수록 예술지원을 수행하는 정부나 정치집단의 입장으로부터 창작자들의 자율성을 보장해주는 장치를 철저하게 제도화하고 있다. 직설적으로 말해 정권에 비판적인 입장을 갖는 예술도 그 사회 미학적 가치가 충분하다면 지원할 수 있어야 하며, 실제로 그런 지원들이 이뤄지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술과 사회공동체와의 관계맺음의 방식을 변화시키려는 시도다. 예술지원은 단지 예술가들의 개별적 활동에 대한 지원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예술 공공성 측면에서 예술가가 사회적 재원으로 지원을 받는다면 응당 그 성과와 과정에 대한 사회적 공유가 이뤄져야 하는 것이다. 물론 그 방식은 다양하게 이뤄질 수 있을 것이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창조된 예술작품 자체를 공공적으로 소비(향유)되는 방식을 취할 수도 있고, 예술의 창작 과정에서부터 사회 공동체와 밀접하게 결합되어 진행되는 방식도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최근 조금씩 퍼져나가고 있는 커뮤니티아트나 공공미술 같은 시도들이 예술지원제도 안에서 보다 깊숙이 들어올 필요가 있다.
 예술은 근본적으로 가난해야 한다. 하지만 이 가난이 걸인의 초라한 궁핍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이 시대 예술가에게 필요한 가난이란 염결한 영혼의 진정성과 반성적 상상력을 지켜나가기 위한 방패여야 한다. 예술이 마냥 황금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을 잉태한 공동체와 호흡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 그것이 문화국가로 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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