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백균 / 한국화학과 교수

나는 미학과 예술론을 강의한다. 따라서 수업 중 가장 많이 언급하는 것이 ‘예술의 의미’다. 언젠가 ‘철학하는 예술가 모임’이라는 전단지를 본 적이 있다.  그 내용은 예술을 형식으로만 대할 것이 아니라 그 궁극적 의미에 대해 고민하고, 예술형식을 통해 사유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시도가 기존 예술행위에 대한 반성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학생들 스스로 제기한 문제라는 점에서 무척 고무적이었고 반가웠다.

그러나 ‘철학하는 예술(Philosophizing Art)’이라는 용어 자체에 대한 비판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최근 들어 ‘철학하는 예술’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이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아서 단토다. 그는 60년대 이후 뉴욕에서 새롭게 선보인 예술양식, 특히 앤디 워홀의 팝아트처럼 기존의 ‘재현’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미술양식을 이해하려는 시도로 이 용어를 사용했다. 미술이 모방이나 재현이 아닌 개념을 다루면서 사유하기 시작했고, 그 사유는 철학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그는 “당신이 예술이 무엇인지 알려고 한다면 감각경험으로부터 사고로 방향을 돌려야 한다. 간단히 말하면 철학으로 향해야 한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이러한 시도는 마치 ‘진리의 인식’을 둘러싸고 그리스 시대 이래 줄곧 대립적 관계를 유지해왔던 철학과 예술의, 즉 철학과 시 사이의 ‘오래된 불화’에 대한 화해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철학과 예술 분쟁의 전제였던 ‘진리의 인식’이라는 근원적 문제로 돌아가 생각해보면 ‘철학하는 예술’이라는 용어가 지닌 비성찰적 태도를 발견할 수 있다. 오늘날의 개념예술에 이르러서야 예술이 감각적 이미지를 다루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유의 차원에 겨우 들어왔다고 여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술은 그 탄생의 순간에서부터 삶의 근원에 대한 반성을 사유해왔다. 다만 그 방식이 철학과 다를 뿐이다. 예술은 이미지로 사유하고 철학은 텍스트로 사유한다. 예술은 이미지의 유사성과 감각의 환기를 통해 의미의 영역에 가 닿으며, 철학은 개념의 분석을 통해 구분과 질서의 세계를 재구성한다. 이 둘은 세계를 바라보는 두 가지 서로 다른 방법이다. 사유하기 때문에 예술이 철학의 영역으로 들어온다면 이는 예술과 철학 모두에 대한 오해에 기인한다. 철학과 예술이 서로 닮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술은 더욱 예술답고, 철학이 더욱 철학다울 때 우리는 삶에 대해 더 깊이 사유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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