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 문예창작학과 교수

대학시절 나를 가르치셨던 세 분의 스승은 교수법이 제각기 달랐다. 김동리 선생님은 강의 첫 시간에 원고지를 나눠주시면서 무슨 형식으로든 좋으니 10장 이상 써보라고 하셨다. 학생들은 나름대로 콩트를, 소설의 줄거리를, 소설의 도입부를, 수필 등을 200자 원고지 열댓 장 분량으로 써냈다. 다음 시간 선생님께서는 빨간 펜으로 교정·교열을 꼼꼼히 본 원고를 돌려주시며 이런 말씀을 하셨다. “재학중 등단을 목표로 열심히 써보게”, “자넨 백일장의 치기를 아직 못 벗어났네”, “한참 더 공부해야 되겠네”, “자넨 글을 별로 안 써봤지?”, “자네 왜 문창과에 왔나?” 차례대로 A, B, C, D, F학점을 주셨다.

싹수가 있는지 없는지 알아본 첫 날의 판단은 정확했다. 그런데 A와 B는 극소수였고, 대개의 학생이 C, D, F의 판정을 받고 4년 내내 전전긍긍했다. 학생들은 선생님의 칭찬 한마디라도 들어보겠다며 글을 썼다. 그 결과 A,B에서뿐 아니라 나머지 그룹에서도 등단자가 나왔다. 선생님은 거북이의 성실성으로 재능 있는 토끼들을 따라잡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런 작전(?)을 쓰셨던 것이리라.

서정주 선생님은 칭찬에 지독하게 인색하셨다. “제발 이런 시는 쓰지 말게”, “이건 시라고 할 수가 없네”라는 한 칼에 목을 베는 말씀을 1, 2학년 내내 줄기차게 들었고 4학년이 되었을 때도 칭찬 한마디 없으셨다. 입영 날짜를 받은 4학년 늦가을에서야 선생님께서는 나를 따로 불러 신춘문예 투고를 권유하셨고, 댁으로 찾아오라고 하여 ‘문하생’으로 선택하는 사랑을 보여주셨다.

구상 선생님은 일단 덕담을 해주시는 분이셨다. “요즘 시가 좀 되는 것 같구나”, “많이 좋아졌다” 이런 말씀으로 기를 살려주시지만 이어지는 평은 서정주 선생님의 말씀보다 더 잔인했다. 지적과 함께 한 행 두 행 지워나가는데, 나중에 보면 남는 시행이 거의 없었다. 건질 수 있는 시행이 한, 두 행도 안 남으니 그 시간도 죽고 싶기는 매한가지였다.

세 분 스승은 전부 다른 세상으로 가셨다. 신춘문예의 계절이 오니 채찍질로 제자사랑을 실천하신 세 분의 스승이 너무 그립다. 나 역시 제자들에게 그러한 속 깊은 사랑을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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