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석 / 생각 실험실 대표

   괴팅겐의 이론물리학자인 보른, 하이젠베르크, 요르단이 1925년 행렬역학을 내놓았을 때 대선배격인 막스 플랑크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이듬해 슈뢰딩거가 파동역학을 발표하자 플랑크는 그에게 “나는 마치 오랫동안 풀지 못해 쩔쩔매던 수수께끼의 해답을 듣는 흥분된 어린아이처럼 당신의 논문을 읽고 있습니다”라고 편지했다. 슈뢰딩거의 파동역학은 플랑크뿐만 아니라 고전물리학의 가치를 존중했던 아인슈타인, 로렌츠, 비인, 라우에 등에게 ‘구원’처럼 다가왔다. 그들은 슈뢰딩거가 물질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운동하는 고전적 그림을 회복했다고 생각했다.

고전주의 대 탈고전주의

   고전주의와 탈고전주의의 두 진영은 정식체계에서 불일치했던 것이 아니라 그 정식체계의 해석에서 불일치했다. 고전주의는 시공간에서 궤적을 그리며 연속적으로 운동하는 입자 개념을 고수하는 반면 탈고전주의는 그런 개념을 더 이상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슈뢰딩거는 두 진영을 오락가락하면서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는 플랑크와 아인슈타인을 칭송하고 보어의 물리학적 반달리즘을 우려하면서도, 인과율에 대한 믿음이 서서히 흔들렸고 측정행위가 측정대상을 어느 정도 구성한다는 점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탈고전주의자들이 보어를 중심으로 ‘코펜하겐 해석’을 제안하자 이 해석은 점차 물리학계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막스 플랑크는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이 진지한 메타물리학적 숙고도 하지 않은 채 코펜하겐 해석에 만족하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코펜하겐 해석 반대의 선봉에 선 사람은 아인슈타인이다. 아인슈타인은 1935년 포돌스키, 로젠과 함께 양자역학의 불완전성을 주장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의 핵심은 양자역학이 기술하지 못하는 실재의 다른 부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논문을 저자들 이름의 첫 글자를 따서 간단히 ‘EPR’이라 부른다.

   EPR 논문은 코펜하겐 해석자들에게 일종의 거대한 폭탄과 같았다. 슈뢰딩거는 EPR 논문을 읽자마자 아인슈타인에게 편지했다. “당신이 독단적인 양자역학의 약점을 공격했기 때문에 나는 매우 행복합니다.” 아인슈타인은 그의 반응에 흡족해 하는 답장을 보냈다. “당신은 내가 함께 토론을 하고 싶은 유일한 사람입니다. 거의 모든 동료들은 사실로부터 이론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이론으로부터 사실을 봅니다. 그들은 한때 그들이 받아들인 개념의 그물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기괴한 몸짓으로 그 그물 안에서 파닥거립니다.” EPR 논문에 대한 그의 예찬에 답례하는 편지에서 아인슈타인은 한 가지 사고실험을 제안했다. 슈뢰딩거는 아인슈타인의 이 사고실험을 발전시켜 1935년 말, 이른바 ‘슈뢰딩거 고양이 사고실험’을 고안한다.

슈뢰딩거 고양이 역설

   약간 잔인하지만, 밀봉된 상자 속에 고양이를 넣는다. 고양이 옆에는 독극물이 들어 있는 약병과 이 병을 깨뜨릴 수 있는 격발 장치가 설치되어 있다. 격발 장치 안에는 방사능 원자가 들어 있고 이 원자가 붕괴하면 장치가 격발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방사능 원자는 붕괴와 안정의 중첩상태에 있는데 이 상태를 |안정>+|붕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여기서 |안정>과 |붕괴>는 원자의 안정상태와 붕괴상태를 각각 표현하는 벡터이다. 그리고 덧셈은 벡터들 간의 합으로서 중첩상태를 표현한다. 만일 방사능 원자가 |안정> 상태에 있다면 독극물이 든 병도 온전할 것이고 고양이도 무사할 것이다. 하지만 방사능 원자가 |붕괴> 상태에 있다면, 독극물이 든 병이 파손될 것이고, 고양이는 독극물을 마시고 죽을 것이다. 그렇다면 방사능 원자가 |안정>+|붕괴> 상태에 있다면 고양이는 어떻게 될까. 양자역학에 따르면 방사능 원자의 |안정>+|붕괴> 상태는 자발적으로 |안정> 상태 또는 |붕괴> 상태로 오그라들지 않는다. 두 상태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계속 중첩상태에 있게 된다. 이런 중첩상태는 결국 고양이에게도 전이되어 고양이는 생과 사의 중첩상태에 처하게 된다. 미시 상태의 불확정성이 거시 상태의 불확정성으로 전염되는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또한 우리가 고양이 상태를 확인하면 삶과 죽음 둘 중 하나를 경험하게 되는데 이론과 경험의 이 불일치를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 이러한 물음들이 갖는 궁지를 ‘슈뢰딩거 고양이 역설’이라 한다.

  

   코펜하겐 진영에 속하는 위그너와 폰 노이만은 누군가 고양이 상태를 인지하기 전까지 고양이는 살아 있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우리가 상자의 뚜껑을 열어 그 속을 들여다보고 감각을 통해 고양이의 상태를 감지하고 그것을 의식할 때, 비로소 고양이의 상태는 삶과 죽음 중 하나로 귀착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비주의적 해석을 피하기 위해 신세대 코펜하겐 해석자들은 고양이와 나머지 환경의 상호작용으로 중첩상태가 급격하게 붕괴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러한 붕괴 과정은 불행히도 양자역학으로 기술할 수 없다.

메타물리학적 물음을 향하여

   고전주의 진영과 탈고전주의 진영의 대결 속에는 정확히 어떤 쟁점이 있을까. 1964년 존 벨은 EPR 역설과 슈뢰딩거 고양이 역설에 들어 있는 쟁점들을 확연하게 드러냈다. 벨은 아인슈타인의 상대론적 인과론과 고전물리학적 실재주의를 가정한 뒤 이것으로부터 경험적으로 검증가능한 부등식을 도출했다. 그 다음 양자역학이 이 부등식을 깨뜨린다는 사실을 증명했는데 이 증명을 ‘벨의 정리’라 한다. 다양한 실험결과 실재에서도 양자역학은 벨 부등식을 깨뜨린다는 것이 확인됐다. 이제 남은 일은 그것의 함축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을 이해할 때 물리학이 다루는 현상계 또는 객관적 세계가 어떤 모습인지 드러날 것이다.

   우리는 세계의 진짜 모습을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까. 신고전주의자 데이비드 봄은 세계가 하부 단위로 나눌 수 없는 거대한 전체라고 주장한다. 이곳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존재들이 존재 가능성을 형성하고 있고 바로 지금 이곳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한편 ‘많은 세계 해석’에서는 양자역학적으로 허용되는 모든 가능 세계들이 평행하게 실재한다고 주장한다. 객관적 세계의 존재에 대해 판단을 중지하는 이들도 있다. 코펜하겐 해석이 그렇고, 양자역학은 단지 경험을 설명하고 예측하는 유용한 도구일 뿐이지 경험 너머의 실재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는 ‘양상 해석’이 그렇다. 물음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물리학은 메타물리학적 물음을 다시 시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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